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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산책

광복 80주년 기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대한광복회
글 편집실
이 문제는 제시문 속 단체가 어떤 독립운동 조직인지를 묻는 사료-조직 연결 문제입니다.
1915년 대구에서 결성, 박상진·김한종 주도,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은 대한광복회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대한광복회는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가 연합한 국내 비밀결사로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②번 보기는 결성 시기, 인물, 활동 내용이 모두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른 선택지는 활동 시기나 인물, 목표가 불일치합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볼까요?

의병의 뒤를 이은 새로운 흐름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무장 의병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고, 독립운동의 중심은 해외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비밀 결사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5년 7월 대구에서는 박상진 선생과 김한종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어 통합 결성된 조직입니다. 국권 회복과 공화정 실현을 동시에 목표로 삼았으며, 복벽주의(왕정복고)와 공화주의(공화정 수립) 이념이 공존하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광복회는 국내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념적 차이를 뛰어넘어 연대를 실현한 모범적인 조직으로, 대구를 거점으로 충청, 경상, 황해, 평안은 물론 만주 길림 등지까지 지부를 확장하며 전국적 조직망을 구축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사령관을 지닌 최초의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 선생
총사령 박상진 선생과 실천적 지도자들
광복회의 활동은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 준비로 이어졌습니다. 회원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일 부호들에게 의연 금을 요구하거나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때로는 처단을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친일 부호 장승원 처단 사건 등이 있었습니다.
조직의 총사령이었던 박상진 선생은 군대식 조직 체계를 갖추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을 준비하며 ‘국민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김한종 선생은 충청 지역 지부장을 맡아 조직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고, 채기중(경상도 책임자), 이병호(전라도 책임자), 우재룡(지휘장) 선생 등 여러 지도자들이 각 지역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이처럼 광복회는 국내 비밀결사 중에서도 무장투쟁과 공화주의를 동시에 지향하며 실천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한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끝까지 꺾이지 않은 신념
1918년 1월, 천안 헌병대는 관내 부호들이 받은 ‘불온 편지’의 발신지가 주로 경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경성·인천 일대를 오가던 장두환 선생께서 먼저 체포되자, 이를 실마리로 박상진 총사령을 비롯해 채기중 선생, 김한종 선생 등 광복회 핵심 인사 400여 분이 연이어 검거되었습니다.
이들 세 분께서는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21년 8월 사형을 언도받으셨고, 박상진 선생과 김한종 선생은 대구형무소에서, 채기중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광복회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회원들은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의 불씨를 이어갔으며, 그 가운데 김좌진 장군께서는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1920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와 상덕태상회 청구서 <출처: 국가유산청>

1920년 박상진 의사의 형판결문
<출처: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이름으로 남은 정신, 정신으로 이어진 투쟁
광복회는 한 시대의 단체를 넘어 1920년대 의열단, 1930년대 한인애국단·한국독립당·한국광복군 등 무장 독립운동 단체와 인물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단체명에 담긴 ‘광복(光復)’이라는 두 글자는 “스스로 조국의 빛을 되찾겠다”는 결의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광복회를 “국내 공화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원형”으로 평가하며,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항일 무장투쟁사의 중요한 전기로 기리고 있습니다.

의병과 계몽운동 세력이 힘을 합쳐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대구 달성공원의 현재 모습

6. 10 만세운동 당시 모습

6·10 만세운동 재판을 보도하는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