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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바다와 역사가 만나는 곳,
진해군항마을로 떠나는
시간 여행
경남 창원
진해에는 시간이 머무는 마을이 있다. 국가기록원이 지정한 기록사랑마을 중 하나인 ‘진해군항마을’. 100년 전 개발된 근대도시로, 그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골목마다 자리한 근대 건축물과 오래된 공간들이 과거와 현재를 잇고, 바다와 벚꽃이 함께하는 풍경이 계절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이곳이 품고 있는 시간과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글 박선경 사진 권진혁

중원로터리, 여덟 갈래 길 위의 역사
진해군항마을은 해군의 도시, 진해의 정취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을 곳곳에는 과거 군항도시로서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그 속에서도 피어난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이 깊은 감동을 준다.
진해군항마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중원로터리는 여덟 갈래 길이 만나는 원형 교차로다. 이곳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1912년 일본이 계획적으로 설계한 근대 도시의 중심이었다. 지금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원로터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근대 건축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진해의 근대사와 군항마을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는 진해군항마을역사관은 마을 여행의 백미다. 191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일반 상점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노인정으로 활용되었고, 2012년에 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진해의 군항도시로서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이다. 특히 낡은 사진 속 거리와 건물들은 지금의 풍경과 맞물려, 이곳이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기억을 품은 공간들, 흑백다방과 원해루
역사관을 나와 거리를 걷다 보면, 일본식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흑백다방은 1912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1960~70년대에는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다. 이중섭, 유치환, 김춘수, 서정주 등 당대의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교류하며 작품을 논하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 시절의 낭만이 느껴진다. 지금은 운영되지 않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붉은 지붕의 육각집은 중국풍의 3층 건물로, 1920년대 당시 상류층이 드나들던 고급 요정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식당으로 변모하여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육각집 맞은편에는 원해루가 있다. 원해루는 일제강점기에는 사진관 겸 시계점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에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이 이곳에서 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그러나 이제는 문을 닫고 시간의 흐름 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대신 중국음식점이 마을 곳곳에 있어 원해루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장병들의 소울 푸드이기도 한 자장면과 짬뽕 한 그릇을 먹다 보니 이것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추억을 공유하는 순간 같았다.
제황산 모노레일과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해
진해군항마을 골목마다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난 후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는 제황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목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진해우체국이 있다. 1912년 지어진 진해우체국은 현관문의 러시아풍 원형 아치와 독특한 건축 양식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현재는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볼 수 없지만, 공사가 마무리되면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제황산 모노레일 탑승장에 다다랐다. 천천히 오르는 모노레일에서 내려다본 진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바다와 도시, 그리고 저 멀리 해군사관학교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진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시간을 걷는 여행, 다시 찾을 이유가 있는 진해
진해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진해역을 지나자 멀리서도 위용을 드러내는 동상이 보인다. 1952년 전국 최초로 건립된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다. 북원로터리 한복판에서 진해를 지키는 충무공 동상은 6·25전쟁 당시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으로 제작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동상 앞에 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되새겨보며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진해군항마을은 그저 옛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었고, 시간이 있었으며, 지켜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봄날 벚꽃이 만개하는 어느 날, 다시 이곳을 찾겠다는 다짐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진해군항마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창선동
http://jinhaegunhang.modoo.at/ ↗︎

원해루

진해역

진해 군항마을역사관

진해 충무공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