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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한국광복군 창설
글 편집실
[정답] ④번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적, 체계적 지원을 위해 세워진 (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①독립문은 독립협회(1896~1898년)의 주도로 영은문 철거 부지에 건립한 것이고, ②서전서숙은 1906년으로 이상설이 설립한 무상 교육기관입니다. ③대한국국제 반포는 1899년 8월 17일 반포되었습니다. ④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부대로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볼까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대표의 기념촬영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출처: 국가보훈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다
1930년대 후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큰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이어지던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분산되고 있었고, 세계 정세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르게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본과 직접 싸울 수 있는 조직적이고 실질적인 무장투쟁 부대를 창설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소규모 부대 단위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왔지만, 독립군의 지휘체계를 통합하고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한 독립군 조직이 절실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임을 천명한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광복군 깃발 아래 모인 독립운동가들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에는 지청천 장군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계통에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과 통합에 힘을 쏟은,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부사령에는 1942년 조선의용대 일부가 편입된 뒤 김원봉 선생이 취임하였고, 참모장에는 이범석 장군이 임명되었습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군의 정치적 지원과 지휘를 담당하였습니다.
광복군은 창설과 함께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항일 투쟁과 국내진공작전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인력과 자금, 무기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훈련과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연합군과의 합동작전을 모색하였습니다. 특히 중국 군사위원회의 ‘행동 9개 준승’에 따라 제1지대와 제2지대를 중심으로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이 경험은 훗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 훈련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깃발은 내려졌지만, 광복군의 정신은 살아 있다
한국광복군은 조국을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기 위해 결성된 독립군이었습니다.
영국군과 협력해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은 중국에서 강제 징집됐던 청년들을 편입하며 부대 확장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규 정부·군대로 승인하지 않았고, 광복군 장병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1946년 5월 16일 복원(復員) 선언과 함께 공식적으로 해산하였습니다.
비록 광복군의 깃발은 내려졌지만, “조국광복은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김구 주석의 신념과 ‘우리 힘으로 조국을 지킨다’는 의지는 대한민국국군 창설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국가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합의한 김구 주석과 도노번 장군 <출처: 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