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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광주학생독립운동

편집실

[정답] ⑤번

문제의 이 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입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 간 충돌을 계기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항일 학생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3년 ‘학생의 날’이 제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신간회 중앙본부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면서 운동의 확산을 뒷받침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볼까요?

일제의 차별에서 비롯된 불씨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제지하던 조선인 남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하면서 싸움이 번졌고, 곧 경찰의 일방적인 일본인 편들기가 이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생 간의 다툼이 아니라, 식민지 교육 속에서 누적된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학생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고, 학교 현장에서는 차별적 대우가 일상이었습니다. 광주역 사건은 이미 쌓여 있던 민족적 울분에 불을 지핀 계기였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룬 호외(조선일보/1930. 1. 1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룬 호외(조선일보/1930. 1. 1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학생들의 시위 모습
<출처: 국가보훈부>

광주에서 전국으로 번져간 함성
사건 직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항일 비밀결사인 성진회(誠進會)가 있었습니다. 성진회는 1926년 결성된 학생단체로, 독서회를 가장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만세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광주고보의 안종화, 박준채 선생이 학생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박기옥 선생은 11월 12일 교정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여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목소리를 낸 이 시위는 광주 지역 20여 개 학교로 퍼졌고, 이내 서울·평양·대구·원산 등지로 확산되었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전국 300여 개 학교에서 약 5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학생들의 희생
일제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경찰과 헌병이 학교를 포위하고, 수많은 학생들을 체포·투옥하거나 퇴학시켰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1만 7천여 명이 검거되고, 3천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580여 명이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학생들의 항일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전국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이후 신간회 등 항일단체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의미, 꺼지지 않는 불꽃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한 학생들의 저항을 넘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민족의 혼을 지킨 항일운동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청소년과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며 조직적·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운동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민족의 불꽃이었고, 해방 이후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바로 그들의 함성과 희생 위에 서 있는 것 입니다.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출처: 광주시교육청>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출처: 광주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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