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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전환

나는 대한민국
비상계획관이다!

이상민 예비역 육군 대위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위대한 전환

무기력한 날갯짓
2015년 6월 30일 전역을 앞둔 육군 대위. 내 나이 29세. 소위로 임관하여 군대에서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오르고 싶었으나 하늘은 생각보다 높았으며 날갯짓이 느려 날 수가 없었다. 누구의 탓도 아닌 내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어 생긴 일로 군복은 나랑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 생각하고 내려놓게 되었다. 꽃다운 20대를 군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다년간 회식으로 술에 절어 지방간과 니코틴으로 찌든 폐. 이따금 실시한 전투체육 덕분에 지금까지 숨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전역할 날을 앞두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독신자 숙소 안에서 숨이 턱턱 막혀오는 압박감과 두려움이 나를 감싸고, 집에서는 전역하는 줄도 모르고 있을 부모님의 근심 깊은 얼굴이 떠오르며 하루하루 괴로운 날들이 지나갔다. 각종 수험서는 많이 구매 했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각종 핑계를 대며 보지 않았고, 주변 동료의 꾐에 술로 밤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나가서 밥벌이하고 살 수 있을까? 하~’ 늘어가는 건 한숨과 후회뿐.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집중해 보자고 다짐하지만 쉽지 않다. ‘전역하면 어떻게 되겠지… 내가 일할 자리 없겠어?’라는 막연한 생각은 역시나 큰 오산.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밖은 시베리아의 강추위만큼 싸늘했다.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예전에는 관심 없었는데 점점 피부로 와닿는다.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할까?

부대로 공문 하나가 접수되었다. 전역 예정 장병을 대상으로 KB에서 주최하는 취업박람회 행사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큼한 충격을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참여하였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물론 나처럼 준비 안 하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행사의 프로그램은 알차고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나 나에게는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이번에는 국방전직교육원에서 중·장기 복무자들 전직준비를 지원하기 위한 교육에 참가하였다. 내 코가 석 자라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과 조별 토의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강점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고 내 인생에 대해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 말주변이 없었던 나에게 모의 면접은 큰 힘이 되었다. 단단히 다져가는 나의 자기소개서에 자신감이 점점 붙기 시작하여 여러 회사에 지원했지만, 서류 광탈. 하나는 붙었지만, 그마저도 인·적성검사에서 탈락. 내 인성이 그렇게 좋지 않나?

삼식이가 꾼 1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SNS를 보다가 소대장 때 중대장님으로 모셨던 분이 보여 오랜만에 인사나 드릴까 하고 연락하게 되었다.
“중대장님, 전역하고 오랜만에 연락드렸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전역했어? 축하한다. 취업은 했니?”
“아직이요… 뭐… 이거저거 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 않네요.”
중대장님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생각해 둔 거는 있고? 혹시 비상계획관이라고 들어봤니?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때? 내가 지금 0000에서 비상계획관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역장교가 도전하기 아주 좋아! 내가 수업 때 들었던 자료랑 교수님 소개해 줄게.”
중대장님의 따뜻한 목소리는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렸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중대장님에게 감사하며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전해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다시 의자에 앉으려니 좀이 쑤셨지만, 엉덩이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오래 앉아서 공부했다. 처음에는 ‘버텼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비상계획관 강의는 서울에서 오프라인으로 있었기에 대구에서 새벽 첫차에 몸을 실었다. 입김이 새하얗게 뿜어져 나올 정도로 찬 새벽 공기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나태함과 안일함을 치료해 주는 극약처방 같았고 합격하는 데 있어서 더 간절함과 절실함을 갖게 해주었다. 문득 수업을 듣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경쟁자면서도 동병상련의 감정이 드는 마치 전우 같은 느낌이랄까. 복잡미묘한 감정이 교차하면서 다시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랐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해서 밤이 되어 집에 도착하니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볼 시간이 없다. 하늘은 계속 깜깜했고 내 미래일 것 같아 불안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집에 아들 이라고 하나 있는 놈만 믿고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깜깜한 밤하늘에 휘영청한 달과 북극성을 찾으며 위안 삼는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 열람실이 열릴 때부터 닫힐 때까지 앉아있었고, 돈도 벌지 않았기에 밥 사 먹는 돈도 아까워 삼식이처럼 끼니때마다 집에서 밥을 먹었다. 몸은 점점 지쳐가고 힘들었지만, 지금의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드시 1등으로 합격하여 부모님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재도전에 이은 뜻밖의 합격
드디어 시험날. 두근두근. 수험표를 가지고 의자에 앉아있는데 내 몸이 왜 이렇게 달달 떨릴까? 긴장하지 않고 공부한 대로만 하자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면 그냥 떨어질 거 같은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현실로 다가왔고 눈물을 훔치며 쓰디쓴 고배를 마셨다. 시험 기회가 3번밖에 없었기에 더욱 초조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더 공부를 많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건 내 탓. 진짜 독해져야겠다.
술 좋아하고 친구들 좋아했던 나를 더 고립시켰으며 내 머릿속에 오직 ‘합격’ 하나만을 생각했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또다시 돌아온 시험날, 처음 시험보다 덜 떨리긴 했지만 ‘기회는 이번뿐 다음은 없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시험을 쳤다. 아쉽게도 합격자 명단에는 나의 수험번호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다시 또 1년의 기다림. 긴 터널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을 하고 있었지만 무너진 멘탈을 부여잡기 위해 아버지 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일을 배워 새롭게 인생의 2막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추가합격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내 정신을 차렸고 내일이라도 당장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솟구쳤다.
근무지가 대구라서 더 기뻤다. ‘나에게도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하느님께 기도드린 것을 이제야 들어주시는구나. 그런데 근무지가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이건 진짜 하느님이 주신 기회구나.’ 누구보다 나의 힘들었던 수험생활을 옆에서 지켜보신 부모님께 바로 알리고 싶었으나,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합격 소식을 알리기로 했다.

비상계획관으로서 그리는 그림
2016년 8월 1일. 첫 출근. 분주하다.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꽃단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어머니께서 노크 하신다. 똑똑. 말없이 들어온 어머니는 고생했다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신다. 전역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부터 수험생활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을 비비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어머니는 내 와이셔츠를 다리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옷을 다리는 것에 마냥 행복해하셨다. 어머니가 행복해하시니 나 또한 행복했다.
입사 후에 비상계획관이라는 이런 생소한 직책에 모두가 궁금하게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낙하산이라는 소문까지 들렸다. 어렵게 공부하고 시험을 쳐서 합격했는데 낙하산 소리를 들으니 너무 속상했지만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리기 위해서 충무계획부터 수립하였고, 병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에 대해 매뉴얼을 만들기 위하여 각종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수많은 고민을 했다. 입사 후 경주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지진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지진에 관한 매뉴얼을 작성하였다. 이를 토대로 지진 대피훈련까지 시행함으로써 지진 발생 시 행동요령을 숙지하고 행동화하여 대응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평상시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겠지만, 사전에 재난을 예방하고 재난 발생 시 매뉴얼에 따라 대응하고 복구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도 나는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의 비상계획관으로서 환자 및 내원객과 교직원들이 안전한 상황에서 생활하고 근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지나왔던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적고 있어 현재는 환하게 웃을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현재는 과거의 거울이며 과거 없이는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전역 예정 장병들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 최근 책에서 ‘향상심’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향상심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향상심을 가지고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반드시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제대군인 여러분 모두 아자! 모든 비상계획관들 아자! 아자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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