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 業 LIFE
굿 JOB 굿 LIFE
로봇 태권브이의
비상을 꿈꾸며
2023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공모전 우수상
글 손건희 예비역 육군 소령
1970~80년대에 어린이들에게 로봇 태권브이는 꿈과 희망이었으며, 로망 그 자체였다. 주인공 훈이는 태권브이를 조종하며 악당들을 물리친다. 그 시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센 로봇 태권브이를 조종하는 훈이가 되고 싶었다. 그 소년은 어느덧 50대 중년이 되었다.
나도 예비군 지휘관 시험을
현역 시절 국가기능공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가 있었다.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의 종류는 많았으나 병사들 이외에 간부들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 있는 사람들만 자격증에 도전하곤 하는데 나는 로망으로 여겼던 중장비 분야에 지휘관의 승인을 받은 후 도전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자격증을 한 개, 두 개 도전하다 보니 어느새 중장비 분야의 7대 자격증 중에서 4개를 취득하였다. 커다란 중장비에 탑승한 후 조종석에서 조종 레버를 움직일 때마다 느끼는 묘한 감정과 희열 덕분에 어릴 적에 꿈꾸던 로봇 태권브이를 조종하는 훈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 희열과 기쁨을 잊은 채 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앞세워 예비군 지휘관 시험공부를 시작하였다.
전역 후 대전지방보훈청 제대군인지원센터에서 지원해 주었다. 상담사님이 멘토가 되어 기초상담과 진로 결정을 도와줬다. 또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도 추천해 주셔서 충남서부보훈지청에서 사회적응 교육도 받았다. 주말이면 지방에서 서울로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수입이 연금밖에 없자 아내는 어린이집에 나갔고 나는 공부하는 백수가 되었다. 그 심정은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고생하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빨리 합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들 제각기 타고난 선천적인 공부 능력은 합격 시기를 조율해 주었다. 나도 합격 시기가 늦어질 뿐이라고 생각하며 3년 동안 쓰라린 고통 속에서 6번의 도전을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너무 야속하고 참담했다. 눈물 흘리며 공부하고 이겨내면 될 줄 알았다. 세상이 미웠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을 시험에 응시한 것을 두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왜 또 나만 안될까?’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다음이 더욱 큰 문제였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잠재된 능력을 다시 찾아
시험 결과가 나온 후 며칠이 지나 제대군인지원센터 상담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취업 정보 제공과 상담이 이루어졌고 상담 결과 다음 진로로 귀농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1년 후 품삯과 농약값을 제외하고 이것저것 결산해 보니 터무니없는 금액이 내 손에 돌아왔다. 1년간 수고가 헛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마음과 정신도 피폐해지고 점점 우울해지고 성격은 더욱더 소심해졌다. 그렇게 지쳐 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취업에 도전해 보기를 권유했다. 우선 객관적인 분석을 해 보았다. 나의 장단점, 자격증, 기술, 성격 등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제대하기 전 적성검사에서 중장비 조작원이 나왔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잠재된 능력. 내 능력을 찾아냈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초조함과 불안함 속에서 구직 활동을 다시 하게 되었다.
제대군인지원센터, 각종 취업 사이트, 벼룩시장의 생활정보지 등에서 올라오는 취업 정보 등으로 다양한 경로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아니 그 첫 번째 높은 벽은 나의 자존심이었다. ‘난 소령 출신인데 내가 저런 일을 해?’라는 생각에 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자존심을 버리는 일. 나를 인정하는 일. 너무 미칠 것 같았다. 여러 곳에 취업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탈락한 회사의 인사담당자에게 물으니 나이가 많고 경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쳐 있던 중 생각지도 못한 물류회사의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게 되었다. 70톤 무게의 대형 중장비 조작원을 모집하는데 드디어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면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난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선 나의 근면, 성실한 면을 장점으로 세웠다. 나는 학교 다닐 때와 군 생활을 할 때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바로 그것이 장점이었다. 회사 특성상 늦게 출근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업무에 차질이 많이 생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출퇴근이 명확히 잘 지켜지는 인력이 필요한 회사였다. 면접관으로 오신 회사 이사님께서 군 출신에 근면 성실하고 자신감이 있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곧 나와 아내는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50대에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감사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나. 하지만 팀의 막내
첫 출근 후 나는 선임 직원의 중장비 소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번쯤 어느 기차역 인근에서 봤던 대형 중장비. 그 장비의 이름은 ‘리치스태커’였다. 생소한 이름은 둘째치고 그 장비 크기에 놀랐고 선임 직원들이 집채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컨테이너를 들고 일하는 모습에 놀랐다. 마치 어릴 적 TV에서 보던 로봇 태권브이가 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묘한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이 장비의 특성은 세 종류의 중장비가 복합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나는 다행히 중장비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서 기술 습득에 어려움이 없었다.
드디어 2주 후 결정적인 실력 테스트 날! 휴일 근무일에 기사반장과 단둘이 일하게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중장비를 다루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마쳤다. 드디어 그 깐깐한 기사반장도 마치 경력이 몇 년 있는 사람 같다며 합격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3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나는 정직원이 되었다.
나는 중장비를 다루는 직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지만 팀의 막내다. 나는 가장 일찍 출근해서 장비에 시동을 걸고 각종 안전 상태를 미리 점검하고 청소하며 작업 세팅을 해 놓는다. 당연히 막내라고 생각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먼저 하곤 한다. 선임 직원들은 나의 행동에 늘 고마워한다. 기술직이라 정년이 없어 능력만 되면 나이에 관계없이 계속할 수 있다. 힘들고 짜증 날 때도 있지만 군 생활 때 고생보단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그 힘든 군 생활도 23년을 견뎠는데 못 할 일이 있겠는가? 비록 어느덧 제대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군인정신은 여전히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군은 내 인생의 상징이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현재의 나의 모습이 있고 이렇게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군은 나에게 다양한 경험과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지난 10년간의 내 인생은 떨어짐의 연속이었다. 진급에서 계속 떨어졌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예비군 지휘관 시험에서도 6번이나 떨어졌다. 입사 시험에선 1차 서류전형에서 광탈을 맛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 수많은 불합격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삶이 즐겁고 매우 행복하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들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 일을 시작하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매일 아침 출근이 기대된다. 어릴 적에 로봇 태권브이를 조종하는 훈이를 꿈꿨던 나는 이제 이 커다란 장비를 조종하며 내 꿈의 날개를 더욱더 크게 펼칠 것이다. 나의 꿈에 대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며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