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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전환
새로운 희망, 끝없는 도전
성 천 예비역 육군 소령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유년 시절 꿈이 장교였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새벽에 일찍 일어나 왕복 6km 되는 친척 집에 가서 손바닥에 도장을 받아 오라고 아버님께서 주문 하셨다. 이유도 모르고 한 달, 두 달, 1년이 지나다 보니까 어느덧 달리기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고, 달리기가 기초가 되다 보니까 핸드볼, 배구, 축구 등의 구기 운동은 또래 동료들보다 월등히 잘하였다.
어느 날 빛바랜 가족 사진첩에서 우연히 아버님 군 생활 사진과 정복 사진을 볼 수 있었고, 제복 입은 아버님의 사진이 너무 멋있게 느껴져 어릴 적 장교가 꿈이 되어버려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1986년 12월 3사관학교 23기로 임관하고 12사단 51연대 1대대에서 통신 소대장으로 GOP 철책 근무와 FEBA에서 근무하다가 76사단 115연대에서 군수장교 근무 중에 3사관학교 학부과정(군사대학) 8기에 합격이 되었다. 2000년 10월에 소령으로 진급을 하였고, 2010년 7월 31일 전역. 만 23년 8개월간 직업군인의 길은 파란만장하였고 후회는 없었다. 후회보다 본인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약 24년간의 군 생활 동안 대부분 중대장, 대대장 등의 지휘관으로 근무해, 직접적인 상대는 병사들과 늘 교육 훈련하고 생활하면서 단 한 건의 인사(사망)사고 없이 귀한 자식들을 부모님 품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직업보도반 교육까지는 크게 걱정을 하지 못했다. 교육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마음이 초조하고 집안 식구들은 정신적 혼란에 빠져 버렸다. 당시 처와 초등학교 4학년, 고등학교 2학년, 대학교 1학년인 세 딸이 있었다. 쉽게 얘기해서 월수입이 1/3로 축소된 연금만으로 세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 복무 시절이었던 2003년경 계급정년으로 전역을 하게 되면서 노후 생활 차원에서 당시 분당에 보유하고 있던 아파트를 담보 잡아 원룸, 고시텔을 건축하는 업자에게 투자했었는데, 사기를 당해 원금은 고사하고 대출이자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직업보도반 교육 종료 3개월 전부터 인천에 사는 고향 후배가 운영하는 중고차 매매센터에서 한 달 정도 일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네트워크 판매(일명 다단계)를 하였다. 다단계가 사람을 설득하기에도 너무 어려웠지만 중요한 건 수입이 되지 않았다.
다음은 워크넷을 통해 동기생이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위치한 친환경농산물 법인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생산된 농산물을 수확해 온 것을 소분해서 판매하는 마트와 식당에 납품하는 업무였다.
2012년경 농산물을 수거하러 강원도 횡성 둔내에 위치한 작목반을 찾았다가 농가 주인이 운영했던 300평 규모의 축사와 한우식당이 오래전에 비어있는 상태임을 확인하였고, 이 부분을 임대하여 처음 사업을 하게 되었다. 청태산 횡성한우식당 상호를 걸고 축사에는 처음에 한우 8마리를 입식하여 시작한 것이 2년 만에 40여 마리가 되었지만 한우가 먹는 사룟값이 장난이 아니고, 식당 또한 변두리에 있어 운영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 와중에 식당과 축사가 경매에 넘어가는 바람에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고, 전세 보증금 5천만 원도 못받게 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경찰서에 피해접수를 하고서 횡성읍 공근면, 태백, 서울 모래내 시장에 식육 가공업을 하는 정육점을 전전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전세금 반환 소송에서 다음 해인 2014년 지루하고 긴 재판에서 승소하게 되어 보증금은 돌려받았다. 앞서 군 생활간에 원룸, 고시텔을 건축하는 업자에게 투자한 부분도(1억 5천) 승소했다.
업자는 기소되었고(징역 19개월), 형 집행 중에 업자 가족들이 지속해서 한우식당에 찾아와 합의를 요청해 강원도 화천비수구미 일대 임야 8천 평을 가등기 받아놓고 합의해 준 사항도 이때였다.
정육점에서 재기의 발판으로 삼던 중에 우연히 거제도에 있는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에서 배관을 설치하는 외주 사업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사업인 셈이다.
상호를 해양산업진흥원이라고 하고 삼성중공업에 3개 팀, 대우조선해양에 4개 팀 100여 명이 조선소 해양 플랜트 분야 배관설치 작업에 우리 회사 이름으로 투입되어 공사하게 되었다. 이 또한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다. 기존의 부가세 5천만을 떠안게 되었고, 근로자들은 바람에 낙엽이었다. 다른 회사에서 일당을 5천 원 더 준다면 5~10명이 퇴사를 하고 그런 공백을 메꾸기가 너무 힘들었고, 원룸 숙소(당시 10개)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했다.
이렇듯 근로자들의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고, 경험도 부족하고, 인맥이 없어 1차 협력업체인 삼성중공업이나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에서 물량을 받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적된 부가세로 인하여 회사를 유지할 수 없어 결국 폐업을 하였다. 늘 뼈저리게 느낀 사항이지만 철저하게 준비 못 한 본인의 불찰과 사업을 하려는 해당 분야에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고 최소한 1년 이상은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최대 시행착오였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두어 번의 송사로 상처투성이였고, 그나마 알뜰살뜰 군 생활간 재산을 불린 분당 아파트와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개발 주택을 모두 날리고 심지어는 사업을 한답시고 은행 대출과 가족들에게 빌린 부분도 상당하였다.
거제도에서 조선소 배관 사업을 접고 잠시 인력 소개업소에 일당으로 막일을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바닥을 찍은 셈이다. 한때 직업군인에 몸담고 있을 때는 상상이 되지 않았고 모든것을 포기하고 싶어 극단적인 선택도 생각했으나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딸을 두고 포기한다면 자식이 살아갈 고통은 불 보듯 뻔하였고, 본인 또한 아버님이 중1 때 돌아가셔서 그 상처와 버팀목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이 안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읽은 책의 고사성어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수도선부 승풍파랑(水道船浮 乘風波浪)이었다. 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자세를 낮추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노동부에서 주관하는 내일배움카드를 통해 거제도에서 창원 학원까지 왕복 2시간 거리를 4개월간 열심히 공부하여 굴착기와 지게차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도중에 택시, 버스, 화물차 운송 자격증, 1종 대형면허를 모두 취득하고 취업 준비를 하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자격증은 있지만,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다양한 건설현장에서 장비를 운용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마산 부영 아파트 현장에서 장비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고, 이어서 부산으로 이동해 철거업체에서 기량과 기술을 익히며 경험을 쌓아 나갔다. 솔직히 말해서 굴착기 일을 하면서 월 3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전남 무안 호남고속철도 현장에서 08w(중형 굴착기) 장비 일을 하면서 월 650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보통 굴착기 일을 하는 장비 기사들은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후 20대~30대에 시작해서 60세 중반쯤 되면 기반을 잡고 은퇴할 나이인데 본인은 나이도 많은 50세에 굴착기 일을 시작하였고, 경험과 기량이 부족해서 이쪽 건설현장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굴착기 일, 기량을 함양하기 위해서 본인은 거제도에서 시작해서 부산으로, 다시 거제도로, 마산에서 양양과 평창, 거진, 합천, 남해, 파주, 문산, 안성, 안양, 무안(현재) 등 굴착기 일과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지역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굴착기 일을 5년 차 할 때쯤 참 고맙고 감사한 것은 국가 정책 사업으로 수도권 GTX 광역철도망, 신안산선, KTX 호남고속철도 공사와 전국 지상에 노출된 지하철 노선을 단계적으로 지하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향후 20여 년은 공사를 계속한다는 것이고, 새로운 희망은 굴착기를 몇 대 사서 건설현장에 월 임대 지입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2022년 9월경에는 사업을 접고 개인회생 신청했던 부분이 마무리되었다. 부가세도 이때 결손 처리되었고, 앞서 잠깐 언급했던 건축업자에게 사기 당해 합의해 준 화천 비수구미 임야 8천 평을 2023년 5월경에는 본등기 하기 위해 법원에서 판결문을 받은 상태이고, 가족들에게 차용한 부분도 매월 일정한 금액을 변제해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2022년 말부터는 금융권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나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나를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며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희망은 2024년 10월경 여수에 위치한 흥우건설 현장에 굴착기 1대를 지입하라는 제안을 받은 상태이고(08w 중형 굴착기 지입 시 월 2,200~2,400만 원 수입), 보유 중인 임야 8천 평과 신안 암태면에 임야 2천 평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해 본인이 배우고 익힌 굴착기 기술로 임야를 개간하고 축사를 건축해서 염소를 사육하는 목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 나이는(60세) 직장에서 모두 은퇴할 나이이고, 그런 친구를 접해 보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다들 고민하고 있다.
또한, 주변 지인들이 재취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현실이고 짠한 마음이다.
감사하게도 난 직장 정년이 없는 굴착기 장비 일을 한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2024년 1월경 아버님께서 6.25 참전 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증서를 보고 기뻐하시던 어머님 그런 어머님께 1년 전부터는 어머님 고향 집에 가족들이 모여 월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제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어머님께서 아프지 않고 근심 걱정없이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옆에서 봉양하는 것이다.
끝으로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응모를 하면서 2010년 전역 후 현재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삶을 돌이켜 보고 60줄에 향후의 삶을 재설계하고 인생을 새롭게 도약할 기회를 주신 보훈부 관계자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두서없는 글을 마칩니다.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