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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전환
서백마을에는
자밭농기계센터가 있다
유덕순 제대군인 가족(예비역 공군 원사 강석권)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아침부터 남편 휴대폰이 요란하다.
“강 사장! 빨리 좀 와야 쓰겄네!”
“강 사장! 여기 대방인디 갑자기 시동이 안 뎌. 얼릉 와!”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남편을 찾는 소리로 난리가 났다. 남편은 아직 잠에서 깨지도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어깨로 받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도 못 먹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슬이 맺혀 있는 논 가장자리를 낡은 트럭이 힘차게 달려갔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풍경이다.
3년의 수련, 그리고 농기계센터 오픈
2020년 말에 제대한 남편과 나는 시부모님이 사시던 고향으로 들어왔다. 제대하기 전부터 준비해 왔던 농기계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남편은 제대하기 1년 전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읍에 있는 농기계센터에 취직했다. 제대로 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닌 시간제 아르바이트였다. 농기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남편을 직원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기계 밑에 들어가면 자기들까지 쉬지도 못하게 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연금 자랑하러 나왔냐며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농기계센터 직원들뿐만 아니라 기계를 고치러 오는 사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나이에 이걸 어따 써먹으려고 배운디야.”
“가만히 연금이나 받고 살지. 사서 고생을 하네.”
사람들은 남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는 했다. 어떤 사람들은 욕심이 과하다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35년을 간부로 있던 남편이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군에 있던 모든 지위와 경력을 버렸다. 마당을 쓰는 허드렛일부터 잔심부름까지 묵묵히 해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여 공구를 닦고 현장으로 달려갈 채비를 해 놓았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직원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직원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남편이 언제까지 다니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남편은 마음을 내려놓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군에 근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때로는 이 나이에 이런 대접을 받으며 일을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힘들어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그만두라고 했지만, 남편은 시작했으니 끝까지 배우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기계를 고치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농기계의 종류는 엄청 많았다. 남편이 다루어보지 못한 기계가 들어오면 옆에 세우고 조목조목 짚어가며 알려주었다. 남편의 성실함을 알아주는 거 같아 무척 기뻤다. 남편도 군에 있을 때 특기인 전기에 관한 것을 가르쳐주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기계에 대한 흥미와 남다른 눈썰미가 있던 남편은 직보 기간을 포함해 3년 가까이 열심히 배우고 모르는 것은 스스로 알아나갔다.
재작년, 남편은 미리 사두었던 땅에 농기계센터를 지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커다란 트랙터 한 대는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었다. 서백마을 자밭농기계센터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기계센터를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운영비는커녕 남편 인건비도 안 나올 거라며 걱정을 해주었다. 남편도 처음에는 농기계를 고치러 오는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남편은 농기계센터를 개업하기 전, 동네 사람들의 기계를 틈나는 대로 봐주고 망가진 물건을 잘 고쳐주어 손재주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덕분에 농기계센터가 문을 열자마자 기계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리 읍까지 가지 않아도 바로 집 옆에서 고쳐주니 작은 기계들을 수시로 들고 왔다. 하지만 간단한 농기계는 들고 오는데 정작 트랙터나 관리기, 이앙기 등 큰 농기계는 읍에 있는 대형 농기계센터로 싣고 갔다. 두 달 동안 문을 열고 대형 농기계를 수리한 건 지인이 가지고 온 트랙터가 전부였다. 트랙터를 살펴본 남편은 오후에 바로 고쳐서 지인의 집에 가져다주었다. 지인은 빨리 수리를 해주고 배달비도 안 받는 남편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그 뒤로 며칠 있다가 다른 분이 트랙터 수리를 맡겼다. 먼저 고쳤던 지인이 소개해 준 것이었다. 남편은 감사한 마음으로 역시나 배달비를 받지 않았다.
남편은 읍에 있는 대형 농기계센터보다 공임도 적게 받았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 공임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돌아가신 시부모님 생각에 어르신들의 기계는 공짜로 고쳐주기도 했다. 남편은 수리할 농기계를 체크하고 나면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품이며 가격 등을 알려주고 주인이 허락하면 그때부터 수리에 들어갔다. 아직 쓸 만한 비싼 부품을 무턱대고 교체하지 않았다. 최대한 쓸 수 있도록 수리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도 남편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농기계센터가 문을 연 지 6개월 정도 지나자 소문이 퍼지고 손님이 점차 늘어났다.
손톱에 낀 빠지지 않는 새까만 기름때
농기계 수리는 한창 바쁠 때가 정해져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트랙터로 논밭을 갈고 농사지을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 트랙터 수리가 많았다. 모내기 철에는 이앙기를 수리하고 타작할 때는 콤바인을 고치러 논밭에 출장 가는 일이 허다했다. 두렁을 만드는 관리기 수리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날은 12시까지 수리를 해도 다 마무리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손님이 늘어난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농사일이 바쁜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맡긴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안 해주냐며 타박을 하기도 했다. 차례대로 해주는데 빨리해 달라고 수시로 달려왔다.
한 번은 수리해 간 지 하루 지난 관리기가 안 된다고 해서 출장을 나간 적이 있다. 주인은 오래된 기름을 잘못 부어놓고 시동이 안 되게 해놨다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난리를 쳤다. 이리저리 손을 보던 남편이 기름을 다 빼내고, 가져간 새 기름을 넣어 시동을 걸자 바로 되었다. 남편은 오래된 기름은 사용하지 말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다. 그제야 주인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또 한 번은 트랙터를 수리해 간 손님이 밭에서 갑자기 시동이 안 된다며 센터로 달려온 일이 있었다. “이게 뭐여? 새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계를 이리 망가뜨려 놔!”
80살이 넘은 어르신은 남편에게 삿대질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손님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내가 자리에 앉기를 권해도 씩씩거리면서 욕을 해댔다.
“실력도 없으면서 덜컥 가게만 차리면 대수여!”




그 말을 듣는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남편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수리비 물려주고 손님을 쫓아버리고 싶었다.
남편은 예초기를 고치던 손을 멈추고 어르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르신은 어제 수리를 해갔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며 물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예초기 수리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르신과 밭으로 달려갔다. 한참이 지난 뒤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며 껄껄 웃었다. 새로 산 트랙터의 작동법을 잘 몰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도, 예초기 수리하러 온 손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더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농기계센터를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돈을 많이 벌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남편이 기계 다루는 걸 좋아했고 읍에까지 가려면 너무 멀기에 마을에 농기계센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으시며 농기계가 고장 날 때마다 읍으로 가져가시던 시부모님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기계를 수리하는 일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논밭에서 뒹구는 기계를 만지다 보니 흙과 기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끔 트랙터 밑에 누워서 수리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웠다. 얼굴에는 온통 기름칠이고 작업복은 흙으로 범벅이었다. 머리에도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허옇게 염색되어 있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남편 손톱에 낀 까만 기름때는 빠지질 않았다. 남편은 모임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면 기름때를 없애려고 손톱을 바짝 깎았다. 그러다 보니 손톱이 자꾸 줄어들었다. 줄어드는 손톱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대형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마음만 아플 뿐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했다.
작년 이맘때 수리를 맡긴 경운기를 트럭에 싣고 배달을 해준 적이 있다. 남편은 트럭과 바닥 사이에 두꺼운 철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경운기를 조심조심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나더니 경운기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남편과 경운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편의 한쪽 다리가 경운기에 깔렸다. 내가 경운기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남편과 힘을 합쳐 겨우 들어 올려 다리를 빼내었다. 남편의 바지는 찢겨있고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팔꿈치에서도 피가 났다. 너무 무섭고 덜덜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보건소에 들러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깊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무릎과 발등에도 멍이 시커멓게 들어있었다. 너무 속이 상해 남편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남편은 농기계센터를 운영하면서 이만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괜찮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찔하고 무섭다. 그날 경운기를 어떻게 주인에게 돌려주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을 사랑방 자밭농기계센터
농기계센터를 운영한 지 2년이 되어 간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 되었다. “강 사장! 나여. 바께스 하나 놓고 가. 복숭아가 참 맛나드라고.”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읍에 가는 길에 먹어보라고 센터 앞에다 복숭아를 두고 간다는 전화였다.때로는 농기계를 싸게 잘 고쳐주었다며 사과를 한 광주리 가져오는 손님도 있다. 좋은 거 못 주고 못난이 사과를 줘서 미안하다며 웃고 간다. 봄철이 되면 지나가다 들렀다며 고로쇠 물을 한 통 가득 가져오기도 하고 더운데 고생한다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는 손님도 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옥수수를 몰래 놓고 가는 어르신도 있다. 자밭농기계센터 커피가 먹고 싶다며 놀러 오는 어르신들에게는 따뜻하고 시원한 커피를 드리기도 한다.
논밭으로 출장을 가면 점심을 먹고 가라며 된장찌개에 풋고추만 내놓는 어르신도 있다. 없는 반찬이라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시부모님 생각이 날 때도 많다.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껏 표현해 주는 동네 분들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자밭농기계센터는 작은 시골 마을에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주는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소통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농기계 수리하는 일은 힘들고 고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편은 힘닿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즐겁게 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나도 흐뭇하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아직도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즐거운 마음이 있어 행복하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 남편이 멋지고 자랑스럽다. “강 사장! 여기 신주골이여. 언능 와!”
트랙터를 잘못 작동했던 임씨 할아버지다. 자밭농기계센터 최고의 고객이 되었다. “네! 지금 바로 가요.”
남편은 오늘도 무거운 공구 가방을 들고 짱짱한 햇볕이 내리쬐는 밭으로 달려갔다. 햇빛에 반짝이는 낡은 트럭은 털털거리며 쌩쌩 달려간다.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