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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3막
2023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글 김영림 예비역 육군 대위
2010년 2월 26일, 국군벽제병원에서 대위 계급장이 달 린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전역식을 한 그날, 축하와 격려 와 우려 속에 내 인생 1막의 커튼이 내려지던 바로 그날, 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가.
전역을 1년여 앞둔 시기에 커피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취미 로 평생교육원 주말반 과정을 수료한 후 바리스타 자격증 을 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 았을 ‘카페 사장님’ 자리까지 탐나기 시작했다. 나는 전역 을 앞두고 있었고, 진로는 미정이었으며, 딱히 잘하는 것도 없었기에 카페 창업이라는 막연한 ‘바람’이 부지불식간에 너무나도 확고한 ‘목표’로 자리 잡아 버렸던 것은 아닐까?
1막에서 2막으로 - 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간호장교로 9년간 복무한 나는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비 로소 진정한 독립을 했다.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 이 더는 들어오지 않고, 두 번의 이사와 살림살이 장만, 식 비 등 기본 생활비 지출로 통장 잔고는 야금야금 줄어만 갔다. 주변에선 9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1년 정도는 여행이나 하면서 리부팅을 위한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 이 실보다 득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 수라는 심리적 낙인을 감정적으로라도 용납할 수 없던 기 질 탓에 오히려 마음만 더 급해졌다. 불안과 압박감으로 자기최면에라도 걸려버린 듯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도 왠 지 나는 잘해낼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바로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임대차 계약 서에 도장을 찍은 그날 밤, ‘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 야?’ 하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독한 겁쟁이 가 충동적으로 덜컥 일을 저질러버렸으니 수습할 길이 막 막했다. 온갖 다이어트를 해도 꿈적하지 않던 살이 저절 로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가게와 집을 오가면서 길가에 차를 대놓고 펑펑 운 적도 여러 번이었 으며, 위생 교육을 받으러 양구에 다녀오던 길에 교통사고 가 날 뻔한 아찔한 일을 겪기도 하면서 한 달여 만에 개업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전역한 지 약 8개월 만인 2010년 11월 6일,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2막 - 나는 모든 여자의 로망을 실현한 사람?
호기롭게도 알바생을 주말과 주중에 2명씩 채용했다. 하 지만 개업을 하고 겨우 한 달 만에 알바생은 주중에만 2명 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명으로 줄였고, 6개월이 채 되지 못해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주 7일을 꼬박 나 혼자 감당해 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오픈빨’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취미가 업이 되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가게를 열고 처음 3개월은 손님이 뜸해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출근하자마자 내리는 첫 에스프레소 테스트샷이 너무나도 향기로웠고, 취향껏 선곡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책을 읽는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봐, 나는 모든 여자의 로 망을 실현한 사람이야.’라는 심리가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 른다. 하지만 저조한 매출 수치를 보면 볼수록 그런 만족 감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결단력도 배포도 없었던 나는 인건비는커녕 휴대폰 요금을 겨우겨우 낼 정도의 실낱 같 은 수익에 매달려 6년을 버티는 미련을 떨었다.
꾸준히 하향곡선만을 그리던 매출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1년여의 지독했던 우울증을 간신히 극복하고 나 서야 자영업 7년 차에 접어들던 2016년 12월 공인중개 사에 가게를 내놓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 간호사 면허증을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임용이라는 마 지막 지푸라기를 잡기로 결심하자 놀랍게도 20년 가까이 손을 놓았던 공부에 고3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불투명한 상황을 탓하며 지독 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상식, 정직하게 말하면 잡지식이 많았던 나는 그 당시 매일 아침 출근 준 비를 하며 듣던 라디오 ‘굿모닝FM 노홍철입니다’ 퀴즈쇼 에 신청 사연을 남겼다. 운이 좋게도 사연이 채택되어 작 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용기를 끌어 모아 출연을 승낙했고 1승을 하고, 2승을 하고 5연승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긴 장과 설렘이 슬럼프가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퀴즈 쇼 우승이 자기 효능감을 불러일으켜 다시 임용 준비에 매 진할 수 있었다.
우연치고는 신기하게도 5연승을 거머쥐고 김치냉장고를 확보한 바로 그날, 그나마 북적대던 점심시간에 찾아온 손 님이 커피숍을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그 후 일사 천리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7년 동안 건물주 좋은 일만 시키고 2017년 9월 17일에 최종적으로 가게 열쇠 를 넘겼다.
2막에서 3막으로 - 늦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의지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결의를 다지고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빼곡하게 계획을 세우고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16시간가량을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했다. 단번에 합격해야만 했다. 두 달여의 지난 한 시간이 흘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2017년 11월,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다행히 ‘2018 중 등교원임용경쟁시험’은 예정대로 치러졌지만 연기될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잠깐 동안 정말이지 지옥을 맛봤 다. 그 정도로 공부에 영혼을 갈아 넣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1차 시험이 끝나고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 쯤 왕중왕전을 위해 다시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고, 노 홍철 DJ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간호장교에서 커피숍 사장으로, 거기에 임용고시와 왕중왕 도전까지! 하고 싶 은 건 다 해야 하고, 그리고 그걸 기어이 이루어내는 집 념의 참가자입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전 정신이 투철하지도 집 념이 강하지도 않다.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 고, 일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성격이다. 다만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지는 않는다. 내게는 고통을 감내해내는 ‘맷집’과 조금 늦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의지’가 있었다. 그러한 의지 덕분에 지금 나는 강원도 원주의 한 초등학교 보건교사가 되어 인생 3막을 살아가며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보고 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내가 원해서, 능력이 있어서 손바닥 뒤집듯 쉽게 직업 을 바꾼 게 아니란 것. 다만 퇴직 후 창업 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급했던 나의 실패를 바탕으로 거듭 신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감당할 각오가 되 어 있고, 충분한 여유 자금과 장기 간의 시장조사 등 철저한 준비를 거쳐 창업할 것을 당부한다. 나 자 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역 후 창업의 실패를 겪었지만, 후회보다 는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계를 위해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있 지만, 나는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나’를 꿈꾼다. 퇴직 후 나만의 커피숍 을 부활시키기 위해 오늘도 나는 성 실히 출근길에 오른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