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 業 LIFE
굿 JOB 굿 LIFE
정확한 직업관은
하고 싶은 일을
잘하게 만든다
2022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공모전 장려상(요약본)
글 고석훈 예비역 육군 대위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였는가
고참 대위가 나이 많은 막내가 되기까지
‘내가 하는 일이 비록 순간일지라도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본인의 복무신조이자 삶에 대한 가치관이다. 그렇게 거룩한 말과 자신감 넘치는 행동으로 10여 년을 복무해온 나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소령 진급과 멀어지게 되었고, 자부심이 강했던 나는 후배들에게 시쳇말로 쪽팔리기 싫어 전역지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하며 돈을 벌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직업 선택의 기준은 다양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돈’이다. 당시 직업 선택의 기준(나름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잘은 못하지만 잘하고 싶은 일, 무조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② 위 3가지 요소를 동시에 충족하는 일은 하늘이 내린 직업이다. 허나 그러한 천직을 가진 사람들을 아직 주변에 만나보지 못했다. 드물다는 것.
③ 그렇다면 나에게 좋은 직업이란 잘할 수 있는 일보다 무조건 하고 싶은 일이 되어야 하고, 무조건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노력 자체가 즐거울 것이며 괴롭지 않을 것이다.
④ 반드시 이 일이어야만 하는가. 다른 일을 하면 두 배를 벌 수 있어도? 그래도 흔들리면 안 된다. 아니 거들떠보지도 않아야 한다.
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을 때, 그 일이 싫어하는 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는가?
⑥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개인과 가정에 안정을 비롯하여 타인과 세상을 나름 이롭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⑦ 마지막으로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는가(사실 이게 가장 중요).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한 가장은 껍데기니까.
위 7가지 기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판단한 결과 ‘차량정비사’로 귀결되었다. 당시 첫째 아들이 태어나 육아휴직 중으로 낮에는 열심히 똥기저귀 갈고 저녁이 되면 경주 ~ 울산 간 100km 구간을 매일같이 왕복하며 자동차직업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 집념에 감탄한 한 선생은 나에게 “해볼 테면 폴리텍대학을 가서 제대로 배워라. 거긴 선생이 아니라 교수가 가르친다. 석훈 씨는 그릇이 너무 커서 여기 직업학교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직업학교 수료 후 ‘자동차정비기능사’를 취득한 나는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해보자는 심산으로 직업학교 선생(지금은 나의 은인이시다)의 조언대로 폴리텍대학 달성캠퍼스 문을 두드렸다.
우수한 성적 및 산물과 함께 폴리텍대학을 졸업한 나는, 유사직무 분야인 건설기계정비 및 운전까지 섭렵하여 늦게 시작한 핸디캡을 실력과 스펙으로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대구 · 경북에서 가장 기술과 매출이 좋다는 남구미 기아서비스센터 AS팀의 막내로 취업하게 되었다.
정확한 지식과 올바른 인격을 갖춘 ‘군인형 기술인’ 고석훈이
정비공장 막내에서 제2의 고향에 금의환향하기까지
하루 사이에 공장 막내가 되어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바빴다. 나이 많은 신입의 험난한 첫날이 시작된 이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욕을 10번 먹더라도 단 1개라도 배운 것이 있다면 그날은 성공한 날이라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쓰기 시작한 정비일기에는 차량을 리프트에 올리는 방법부터 폭언, 욕설, 인격모독을 당해 취해서 울었던 기록까지 정비 노하우와 인간 고석훈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지만 나름 보람 있게 보내고 있던 찰나 내 군 생활 마지막을 살아온 고향과 같은 육군 50사단에서 차량정비담당(8급)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그간의 고생(?)이 보상받는 듯한 김칫국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가슴이 뛰고 동공이 확장되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긴 내 자리다! 아니 나를 위한 자리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아있는 고향 같은 근무지에서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삼아 다시 근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삶에 있어 복된 일인가. 내가 좋아하는 차를 나와 고객을 위해서가 아닌 군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뼛속까지 남아있는 군인으로서의 기질을 전투행동이 아닌 진단과 정비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구현하여 부대와 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참 기뻤다. 군이 날 다시 불러준다는 반가움은 제대군인에게 있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날부로 잠시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무원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한 결과 90점(합격 평균점수 78점)을 취득하여 깐깐한 군무원 필기시험에서 고득점을 획득하였고, 상당한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하여 내 고향 50사단에 작전과장 대위 고석훈이 아닌 차량정비담당 8급 고석훈으로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근무연이 있던 사람들이 놀래더라. 자동차과 출신이었냐고. 혹시 수송병과, 병기병과였냐고. 혹시 입대 전에 정비했었냐고. 군무원 선발팀에 아는 사람 있냐고. 참나 전부 다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하고, 반드시 그 일이여야 한다며 절박하게 밀어붙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니, 나의 집념과 차량 관련 직무지식에 두 번 놀래기도 했다. 혹자는 부정적이었다. 현역 출신이라 뭔가 뒤에서 메리트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한 말을 들으면 난 조용히 내 필기시험 점수를 보여준다. 채점하는 컴퓨터가 고석훈이 대위인지 장군인지 현직자인지 어찌 알겠는가. 내가 작성한 답안이 맞나 틀리나만 판단할 뿐인걸.
여하튼 대위 고석훈은 그렇게 8급 고석훈이 되어, 비록 일천하고 부족하지만 절박하고 뜨겁게 익힌 경력과 지식에 더불어 현역 시절 익힌 군조직의 특성과 업무성향을 조합하여 그냥 차만 잘 고치는 군무원이 아닌, 군경력만 있는 군무원이 아닌, 기술과 군을 모두 아는 군무원이 되어 50사단 수송중대의 代정비반장으로서 정비뿐만 아니라 연간정비계획, 예산관리, 수리부속 공구관리, 폐품관리 등 제반 행정영역까지 주도하고 있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