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Live
무엇이든 물어보살
퇴역 후의
무기력과 번아웃,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글 김신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저자
Q.
안녕하세요. 20여 년의 직업 군인의 삶을 정리하고 다른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40대입니다.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장기라 할 만한 것도 뚜렷하지 않아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만 세고 있는 느낌입니다. 번아웃이라는 걸 한 번 겪고 나니 다시 힘을 내기까지 시동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죠. 세계 수준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에서든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이론입니다. 이에 도달하려면 하루에 3시간, 10년을 꾸준히 임해야 해요. 이 계산법에 따르면 선생님께서는 이제껏 2만 시간이 넘는 시간을 직업 군인으로 살아오신 거지요.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애써오셨어요. 먼저 그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올해로 18년간 글을 써왔어요. 조금 지나면 이 일을 해온 지 2만 시간이 되겠지요. 그런데요, 저는 매일 글을 쓸 때마다 생각합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관두고 싶다고요. 글 쓰는 일 따위 지긋지긋하다고요. 고백하자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고 말았을 뿐이죠.
선생님의 지난 세월도 비슷하리라 감히 추측해봅니다. 하루가 쌓이니 한 달이 되고, 또 일 년이 되어 묵묵히 20여 년을 나라 지키는 일로 살아오지 않으셨을까요.
당장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여러 번이었을 것 같고요.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 찬 날들도 있었겠지요. 남들보다 내가 잘나 보이는 때도 있었겠지만,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하지?’하며 자책하는 순간도 있었을 거예요. 또는 기계적으로 월급에 기대 지내온 시간도, 다른 길을 모색했다가 주저앉은 적도 여러 날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같은 일을 2만여 시간 동안 해오신 겁니다.
세상은 대부분 1만 시간을 성과나 결과로 판단합니다. 전문가가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 그 일로 돈을 벌었느냐, 성공했느냐 하고요. 하지만 1만 시간의 핵심은 그 시간 동안 한 사람이 쌓아온 경험과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1만 시간을 시작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고 믿어요.
얼마 전에 후배를 만났어요. 십 년 남짓 방송일을 해온 후배는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방송 만드는 일밖에 없는데,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그에게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어떤 일을 십 년 한 사람은 뭐든 하게 돼 있어. 십 년이라는 시간은 공짜로 쌓이는 게 아니잖아. 뭔가를 십 년이나 해온 사람은, 새로운 일도 십 년은 해낼 힘이 있다고 생각해.”
저는 먼저 후배에게 게을리 보내는 시간을 제안했습니다. 긴 시간 같은 일을 반복해 온 사람들은 그만큼 성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휴식에 박합니다. 휴일이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일을 쉬는 기간에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창조해 내는 데 선수지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다고 해요. 제가 그랬거든요.
저는 도무지 쉴 줄 모르는 인간이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움직이는 것으로 제 삶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일하지 않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뒤늦게 찾아온 무기력과 번아웃에 시달리며 ‘쉬어야지, 꼭 쉬고 말 거야….’ 하면서도 그 경험을 책으로 써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코미디인지. 아무것도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사람이 쓴 책,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봐 주세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놀, 2018)
오랫동안 해온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와 같은 상실감이 찾아옵니다. 한없이 공허하고, 불쑥 눈물이 나거나 화나 짜증도 솟구치고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나 내 선택이 틀리진 않았는지 자책도 들어요.
이 모든 과정이 애도의 과정 아닐까요. 20여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온 선생님께서 이 과정을 겪지 않으신다면 그게 더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2만여 시간 동안 직업 군인으로 일해오시면서 늘 칼같이 지켜오시던 일상과 헤어지는 일이 어찌 그리 편안하고 가뿐할 수 있을까요.
직업과의 애도의 과정에는 게으름이 도움이 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종일 누워서 드라마를 정주행하거나 만화책만 읽습니다. 짧게라도 혼자 여행을 가고요.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신경 쓸 일도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저는 화분을 들여 보살피거나, 유기견을 입양해 키우는 일로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나와 다른 생명을 책임지며 얻는 위로와 기쁨이 저를 또 살게 하더라고요.
흔히 40대에 들어서면 중년이라고 하죠. 그런데 UN이 정한 청년의 나이는 18세에서 65세까지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기대 수명이 늘어나는 요즘, 40대를 중년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이르죠.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청년의 나이에 2만여 시간 분의 경험을 보유하고 계신 겁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그러니 게으름과 친하게 지내시면서 두 번째 청년의 시기를 준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앞으로 만나실 새로운 1만 시간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