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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my Life
굿 JOB 굿 LIFE

외할아버지의 땡감

김정희 예비역 육군 대위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우수상 (요약본)

굿 JOB 굿 LIFE

어릴 적 외갓집 마당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단감나무이고 또 다른 한 그루는 땡감나무였습니다. 어른들이 골라준 단감만 먹었던 어린 저는 어느 날 마당에 떨어진 땡감을 우연히 베어먹었다가 혀뿌리까지 얼얼해지는 떫은맛에 먹었던 감을 퉤퉤 뱉어내며 “이 맛도 없고 쓸모없는 감나무”라고 욕을 하며 저 땡감나무를 당장 잘라버리자고 외할아버지에게 떼를 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울며 떼쓰는 저를 지그시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떫나? 살다보면 좋은 맛도 있지만, 떫은맛도 있고, 매운맛도 있데이. 이 땡감도 지금은 떫지만, 바람도 좀 맞고 시간을 버티다 보면 단감보다 더 맛있는 홍시도 될 수 있고, 곶감도 될 수 있는 기라.” 당시 너무 어렸던 저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고, 그렇게 땡감은 제 기억 어딘가에 묻혀버렸습니다.

맨땅에 버려진 쓸모없는 땡감
시간이 흘러 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자, 또 군인의 아내,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세 아이를 낳으며 정말 행복했지만, 동시에 양가에서 육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형편과 잦은 이사로 인해 저는 9년에 가까운 육아휴직을 하였습니다. 휴직 기간이 끝난 후 사단 직할대 정작과장으로 복직을 하였으나 대위 기간 진급 연차를 채우지 못했기에 진급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군 생활이 긴 육아휴직 후 복직이었기에 그 자체로 큰 도전이었으며, 군 생활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나 보통의 전역 전 군인들처럼 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생각을 할 여유가 제겐 없었습니다. 2022년 8월, 42살의 저는 그렇게 전역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제게 아이들 키우는 것에 전념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 역시 그럴 생각이었고 전역 후 딱 2달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이들과 남편만 바라보는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에 괴로워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마지막 군 생활에서 정작과장을 하며 배웠던 것들, 훈련을 준비하던 과정들과 주위 동료들, 힘든 일을 끝냈을 때의 성취감, 이러한 부분들이 이제 제 인생에서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떫은맛만 가득 남은 땡감이 된 것 같아 서글펐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삼십대에 열심히 노력해 조직에서 높은 성과와 전문성을 가진 40대가 되었는데, 저는 애를 낳고 키우기만을 반복하며 경력 따윈 모두 날려버린 맨땅에 버려진 쓸모없는 땡감이 된 것 같았지요.

첫 창업 도전의 실패
한번 생긴 우울감은 한없이 깊은 자괴감과 무력감의 늪으로 저를 빠트렸습니다. 전역 후 살이 10kg이나 쪄서, 운동을 해보고자 비싼 헬스 PT를 끊었지만 2번 나가고 나가지 않았고, 요즘 잘 나가는 유튜브 편집기술을 배우고자 컴퓨터 학원을 등록했었으나 일러스트레이션 기초 수업만 몇 번 듣고 지쳐 수업비만 날렸습니다. 분명 군 생활을 할 때의 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날들이 길어지니 무엇이 진짜 제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조바심과 한편으론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점 창업을 고민하다가 주택공사인 LH에서 주관하는 창업지원의 경력단절 여성 유형에 ‘독립서점’이라는 아이템으로 지원하여 최종 단계인 3차 프레젠테이션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선발만 되면 LH 소유의 상가에서 10년 동안 14평 기준 월 30만 원 선의 월세만 내면서 사업을 할 수 있었기에 사업 경험이 없는 제겐 초기 사업의 위험성을 낮춰줄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군 생활 때 쌓은 문서작성 실력은 사업실행계획서 작성이나 PPT 발표 때 많은 도움이 되었고 서점 창업을 준비하며 저는 제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에서 사업 경험이 없으며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저는 떨어졌고, 반드시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눈앞에서 엎어지니 그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책으로 세상을 볼 때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의 실패도 필요한 것이지라고 생각했던 저였었는데, 막상 창업 실패라는 단 한 번의 실패에도 휘청거릴 정도로 저는 멘탈과 체력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학교 청소부로 특수반 학생과의 인연
어둡고 긴 터널 속에 있던 어느 날, 아이의 교육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교육청 홈페이지에서 제가 살던 집 바로 옆 고등학교의 구인공고를 보았습니다. 청소미화원 1명을 뽑는 공고였습니다.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청소부를 하다가 세계적인 락밴드 그룹의 리더가 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처럼 저는 그 공고를 보는 순간 왠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하면 저를 누르고 있는 어둡고 긴 터널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청소미화원 일을 꼭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상의하니 당연하다는 듯 남편은 반대했고, 교육행정직 공무원인 오랜 친구 역시 고등학교 화장실이 얼마나 더러운지 네가 몰라서 배부른 소리 한다며 꿈도 꾸지 말라고 제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던 중 국방전직교육원의 대전 전직지원센터의 팀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역 직후부터 제게 꾸준히 전화를 주며 교육소식이나 정보를 알려주시던 언니 같은 분이셨지만 저는 의례적으로 대응을 할 뿐,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었는데 그 날따라 외로운 마음에 당시의 고민과 상황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전직지원팀장님 역시 장교 출신인 제가 청소일을 한다고 하면 반대하시겠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얘기를 들어주시던 팀장님은 짧으면서 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집과의 거리도 가깝고 일하는 시간 역시 아침에 시작해서 오후 2시 반에 끝나 육아에도 부담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꼭 그 일을 하고 싶다면 해보라고 응원의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남편과 상의 후 그렇게 저는 동네 고등학교 청소부로 전역 후 첫 취업을 하였습니다.구인공고만 달랑 보고 이력서를 제출하러 고등학교에 간 날 ‘ㅁ’ 자형 4층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미화원이 달랑 1명이고, 그 자리에 지원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직원 화장실까지 화장실은 총 32개소였고, 그 밖에 복도나 현관 청소까지 제 일이었습니다. 취업 후 첫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고됐습니다. 육체노동은 자신 있다고 생각한 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했는지 깨달았으며 사람들이 말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일을 시작한 뒤 제게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생활루틴이 생겼고, 또한, 저를 대하는 학교 사람들이 따뜻해서였습니다. 업무량이 많은 걸 알아서인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제가 미숙하게 일해도 무척 고마워하셨고, 처음엔 비교적 젊은 편인 청소미화원 아줌마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학생들 역시 시간이 지나자 고맙다며 쪽지를 주거나 제게 인사를 하며 아는 체 하는 친구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런 친구들 중에 유독 저만 보면, “선생님 파이팅! 힘내세요”라고 외치는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고등학교 남학생과 다른 그 친구의 밝음이 무척 좋았지만, 며칠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정말 볼 때마다 변함없이 인사하는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뭔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며 가며 인사한 덕분에 친분이 쌓여 이름까지 알게 된 뒤에야, 이 친구가 특수반 소속이며 약간의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수교육지도사에 도전
그 뒤 교실 이동이나 식사 이동 시 멈칫하거나 방황하는 그 친구를 도와주었는데 저의 그런 모습을 보신 어떤 선생님께서 제게 특수교육지도사를 준비해 보면 어떻겠느냐란 말을 던지셨습니다. 특수교육 선생님은 들어봤지만, 특수교육지도사란 직책은 너무 생소해서 저는 대학전공도 행정학이고 특수 쪽은 관련 자격증도 없으며, 지식도 없어서 힘들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특수교육지도사는 특수선생님의 교육을 옆에서 보조해 주는 직책으로서 정년이 보장되는 교육공무직의 한 직렬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제게 작년 지역 교육청의 선발공고문까지 뽑아 주셨습니다.
그 뒤 교육공무직은 교육청마다 선발하는 방법이 다른데 제가 살던 지역의 교육청은 자격증과 경력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시험과 면접으로 뽑는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소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되던 시점에 저는 드디어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치우고 뒤돌면 더러워지는 매일 반복적인 청소업무였지만, 그 일을 형벌이라 생각하지 않고 마치 어려운 게임의 각 단계를 격파하듯이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일을 하니 저도 모르게 제 안의 내면이 단단해지고 이제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렇기에 다른 일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특수교육지도사 선발 시험과목은 국어, 국사, 사회였고 국어와 사회는 고등학교 수준 문제집을 풀고 국사는 유튜브에 올라온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를 설거지 같은 집안일 할 때 틀어놓고 들으며 시험 준비를 하였습니다. 필기시험은 11월 연말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공부를 짧게 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첫 시험이기에 큰 긴장감 없이 어떤 유형의 문제들이 나오는지 알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살면서 시험에서 운이 따라줬던 적이 거의 없었던 저였기에 요행을 바라진 않았었는데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운 좋게 첫 필기시험에서 합격권인 2배수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차 서류전형과 2차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3차 면접과 인성 검사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면접 경험이 거의 없던 제게 전직지원센터 팀장님께서 모의 면접을 봐주시겠다며 연락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1차와 2차는 통과했지만, 마지막 3차 면접 앞에서 막막해하던 저에게 전직지원센터 팀장님의 제안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습니다. 모의 면접을 통해 저는 면접 시 예절과 시선 처리, 올바른 답변 방법 등을 알게 되었고 이는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직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저는 최종 합격을 하였고 2024년 3월, 집에서 10분 거리의 유치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행복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쓸모없는 땡감 같다는 자기비하에만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행복이며 또한 전직지원센터의 조력과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시간을 버티면 떫은맛이 옅어져 단감이 되는 땡감처럼,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응원가가 되기를 바라며 마칩니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

김준식 예비역 공군 중사큰 꿈은 깨진 조각마저 크다
김준식 예비역 공군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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