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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my Life
굿 JOB 굿 LIFE

내 역경 극복의 토대가 된
용기와 노력 그리고 도전

이성희 예비역 육군 대위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우수상 (요약본)

굿 JOB 굿 LIFE

2001년. 21세기의 첫 번째 해이며,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해에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년간은 활기차고 자유로운 대학교 환경에 선후배, 동기들과 아무 걱정 없이 생활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꼭 한번은 거쳐야 할 군대로 인하여 곧 깊은 불안과 초조함에 떨어야 했다. 그러다 이왕이면 병사가 아닌 간부, 특히 장교로 군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다가 학사장교를 알게 되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며 힘들게 면접 준비를 하고, 체력검정에 대비하여 운동을 열심히 하여 합격하게 되었다. 3사관학교에서 한창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부터 10월까지 군사훈련을 받고, 대전 자운대 종합군수학교에서 OBC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사회에서는 제2의 IMF라며 경제도 힘들어지고 실업률이 한창 오르고 있어서 나는 교관님의 권유로 장기복무를 생각하게 되었다.
OBC 교육 간 교육장교 임무를 수행하면서 각 과목마다 발표 및 시험에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의 결실로 나는 최종 4등을 차지하여 교육 수료식 날 단상에 올라 상장과 부상을 받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장기복무를 신청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이후 소대장을 수행하고 OAC 교육 후 우리나라 제일 북쪽 22사단에서 중대장 임무를 수행했다. 중대장은 소대장 업무와는 많은 부분이 다르고 어려웠다. 모든 업무는 더 정확하고 섬세해야 했고 그에 따른 책임도 커졌다. 그래서 중대장이라는 직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한시라도 빨리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야근도 많이 했고, 중대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중대장 임무수행 후 12사단, 28사단 등 전방 사단만 돌아다니며 복무하고, 소령으로 진급을 위해 5차례나 노력했지만 실패하여 결국 전역을 준비하게 되었다.
15년. 짧지 않은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니 처음에는 앞으로의 나와 내 가족의 생활이 막막하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군인으로서 어떠한 임무를 부여받더라도 완수해 왔었기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내게 사회는 냉정했다. 30여 군데가 넘는 회사에 지원해 겨우 주야 교대로 12시간씩 근무하는 비닐공장에 취업하게 되었으나 이 회사는 나에게 맞지 않는 곳이었다. 군 복무 간 철야 훈련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주야 교대 근무도 괜찮을거라 생각했으나 실질적인 공장 업무는 굉장히 몸에 무리가 가는 힘든 작업이었다. 매일 20kg 이상 되는 비닐 재료를 200포대 이상 내 힘으로 들어 기계에 부어야 했고, 50kg이 넘게 만들어진 비닐을 50m 이상 이동 후 창고에 쌓는 작업이 지속되었다. 점점 몸이 상해가는 것을 느끼고 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붙여가며 생활하였다. 그 무렵 계속 내가 이 회사에서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내와 뱃속에 쌍둥이를 생각하며 군 간부 생활을 통해서 얻은 책임감,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이겨내자고 다짐하였다.그러나 그러한 다짐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일하던 것을 멈추게 되었다. 어렵게 타지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생의 전화로 듣게 된 어머니의 신장병 진단.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것이다. 당장 수술하지 않거나 신장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부터 견뎌내시며, 몸과 마음을 다해 나와 여동생을 안아주고 돌봐주신 따뜻하고도 아픈 존재였다. 닥쳐온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내 신장을 이식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으나 불가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 곁에 같이 있어 주면서 빨리 나아지시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더 야위어 갈 뿐이었다. 4시간이 넘는 수술과 1주일에 3~4번 신장투석을 하셨다. 신장투석 간 너무 고통스러운 표정이 어머니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점점 살이 빠지고 안색이 나빠졌으며 이후에는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셨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니던 비닐공장을 그만두고 어머니 병간호에 힘썼다.
그로부터 4달 뒤, 아픔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아내가 임신 7개월 만에 쌍둥이 중 첫째 아이의 양수가 터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집 근처의 산부인과에선 조치할 수 없어 큰 대학병원으로 옮겨 입원하였다.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바로 제왕절개로 두 아이 모두 꺼내야 아내와 아이들 모두 살릴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보통 신생아 몸무게의 절반도 안 되는 1.2kg의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오히려 양수가 터졌던 첫 째 아이보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 숨을 쉬지 않았으나 다행스럽게도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살아났다. 이후 두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서 3개월간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동안 어머니의 병세는 더 악화되고 있었고, 나는 신장 이식자가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며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1달 정도 지났을 무렵 기적이 찾아왔다. 어머니께 이식이 가능한 신장 기증자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고 정말 하늘에 감사하였다. 또한, 어머니의 건강을 간절히 원하여 이루어졌듯 내 미래도 다시 한번 열심히 준비하고 간절히 바란다면 화창한 봄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경력 채용 군무원 모집을 알게 되어 15년의 군 복무 경험을 살려 5급 군무원에 지원하였다. 아내에게 군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하고 1년 정도만 고생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치러야 하는 시험과목은 행정법, 경영학 2가지였는데 특히, 행정법이 사회의 행정고시 수준으로 생전 처음 보거나 외워야 할 법 규정과 판례가 너무 많았고 책은 상상외로 엄청 두꺼웠다. 그러나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10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고 집에 와서도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처음엔 용어를 몰라 무조건 외우다 보니 금방 잊어버리고 진도도 나가지 않았지만, 학원도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신청하여 조금씩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험 당일,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해 온 시간을 생각하며 시험에 집중하고 열심히 풀었다. 그렇게 시험은 끝이 났고 한 달 뒤 결과는 불합격.
그렇게 1년 사이에 많은 어려움과 실패를 맛본 나는 사회생활에 너무 자신이 없어졌다. 군무원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지, 다른 직장을 두드려봐야 하는지 고민도 많이 했다. 그때 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조금 더 노력하면 잘 될거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자신이 더 뒤에서 도와줄 테니 힘을 내라는 아내와 많은 지인들의 응원으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입사할 수 있는 직장이 무엇이 있는지 책, 인터넷 등을 통해 확인하였고, 닭고기 가공공장, 동물 사료공장, 약품회사 등 여러 회사에 서류를 넣고 면접도 보았다. 그중에서 가축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환경보전 회사에 합격하였고 바로 업무에 뛰어들었다.
가축 폐기물은 소, 돼지, 닭 등의 배설물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 침전물과 여기에 톱밥과 미생물 등을 첨가해 발효시켜 퇴비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환경보전 기업의 조직사회에 대한 이해, 폐기물을 재활용하여 퇴비로 생산하는 기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입사한 회사는 너무도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학 시절 식당, 마트 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생활을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군대에서의 15년이라는 생활 때문인지 사회 조직에도 융화되지 못하고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노력하면 회사에 적응하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가축 폐기물이 어떤 원리와 과정을 통해 퇴비로 재생산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폐기물 재활용 관련 자격증인 환경기능사를 회사 일과 종료 후 혼자 남아 공부하여 취득하였고, 가축 폐기물에 어떤 재료가 얼만큼이 첨가되는지, 또한 어떻게 포장하여 생산되는지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고 1시간 늦게 퇴근하며 확인하고 기계 조작법을 익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사들의 무시와 각종 갑질, 그리고 인격 모독 등의 수치심을 어떤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군 복무 시절 지휘관의 지시는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라 여기고 부대를 위해서라면 어떤 임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수행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상사들이 지휘관이라 생각하고 상사가 부탁하는 사소한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완벽하고 깔끔하게 소화해 나갔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조금씩 인정을 받았고, 10억이 넘는 사업을 성공시키는 등 이제는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 잡은 이후에도 군대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년째 비상근 예비군 간부로 선발되어 동원사단의 군수지원대대 지원과장으로서 연간 15일 이상의 군 복무를 수행 중으로 지금 속한 군 조직에 내 능력이 조금이라도 도움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현역 시절 이루지 못한 진급을 예비역 간부로서 하게 되어 이제는 전시에 대위가 아닌 소령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전역을 앞두거나 전역을 한 선후배, 동기들은 차후 사회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처럼 인생의 전환점마다 힘들고 어려웠던 난관들을 맞이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절하게 바라고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으로 슬기롭게 이겨낸다면 군 생활보다 더욱 밝은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포기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군 생활 때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사회에서 약해지지 않고 강해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기회가 오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전역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도 아무리 힘들더라도 가족에게는 떳떳하고 당당한 가장의 모습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당신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아내, 아이들이 내 모습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취업하기 힘든 상황이라도 어려운 관문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간절히 원하고 준비하여 노력하고, 도전하여 열심히 취업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 일 것이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바라는 곳의 취업에 성공하는 사람이 꼭 되었으면 좋겠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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