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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요약본)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요약본)
청천벽력(靑天霹靂)
2020년 1월 23일 목요일, 설 연휴를 하루 앞둔 늦은 저녁. 뉴스를 통해 귀성길과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119구급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분께서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입니다! 지금 빨리 이쪽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시 남편은 해군 장교로 가족들과 떨어져 경북 포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설 연휴를 맞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워 차에 태우고 포항을 향해 달렸다. 걱정과 두려움에 눈물이 앞을 가려 밤길 운전이 힘들 정도였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영문도 모른 채 뒷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6살 아들과 5살 딸아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이동 중에 119구급대원과 통화하며 남편이 이송될 병원을 확인하였다. 남편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포항 인근에서는 처치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있는 대구의 대학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하였다. 의식이 없고,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응급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치의 교수님이 도착하자마자 수술이 시작되었다. 3시간여의 응급수술이 끝나고 “현재 응급처치는 하였으나 출혈과 골절이 너무 심하고, 지혈이 잘 되지 않아 위중한 상황입니다. 새벽이 고비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대기실 의자에 누워 자고 있었고, 시어머님께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반드시 다시 걸을 수 있을 거야!
수술실에서 나온 남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식이 없는 남편을 보며, ‘제발 살아만 주기를! 신이 있다면 제발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를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새벽이 밝았고, 천만다행으로 생사의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는 잠시.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불안감이 다가왔다.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2주 만에 다행히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계속되는 추가 수술을 받으며 중환자실에서 1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일반병동으로 옮긴 후에도 수술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12번의 수술과 치료를 거치며 10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주치의 교수님께서 “일단 저희가 할 수 있는 의학적 조치는 여기까지입니다. 이후부터는 병원을 옮겨 재활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장애가 남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재활에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걸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대학병원은 환자가 수술 이후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입원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수술적인 치료가 완료되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 전원, 즉 병원을 옮겨야 한다. 남편은 사고 이후 10개월을 병상에 누워만 있었다. 골반과 고관절을 비롯한 대부분 관절에 골절을 입은 상황이라 걸을 수가 없었다. 집 근처 병원에서 재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수술 후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보다 재활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힘들고 안쓰러웠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재활치료를 하는 남편을 보며, ‘반드시 다시 걸을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 하나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다시 걷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힘들었을지 그 고통과 두려움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6개월여의 재활과정을 거치면서, 남편은 휠체어에서 목발을 짚고 일어서고, 다시 목발에서 지팡이를 짚고 걷고, 결국 지팡이나 주변의 보조 없이도 혼자서 서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병원에서 지팡이를 놓고 첫걸음을 떼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병원 주치의 선생님과 재활담당 선생님, 그리고 많은 환자분의 응원과 환호를 받으며 그렇게 남편은 다시 걸었다.
전역 결심과 시험 응시, 그리고 비선
남편은 다시 걷게 되었지만 또 다른 고민에 봉착했다. 그것은 군복무에 대한 복귀 가능 여부와 미래의 불확실성이었다. 사실, 남편은 사고 이전의 신체조건으로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군에서의 정상적인 활동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전역을 결심하고, 2022년 6월 30일 21년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명예전역을 하였다.
막상 전역을 앞두고 보니 남편과 나는 앞으로의 생계가 막막하였다. 당시 아이들은 초등학교 2~3학년에 불과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직장을 구해야 하며 어떻게 인생을 설계해야 할지 모든 것이 캄캄한 상황이었다.
전역을 몇 개월 앞둔 시점부터 남편은 취업을 위한 도전을 시작하였다. 그 첫 도전은 소위 비상계획관으로 불리는 ‘비상대비업무담당자’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몸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보니 시험 준비에 장시간을 투자하기 힘들었다. 또한, 서류전형을 위해 한국사, 컴퓨터활용능력, 안전분야 자격증 등 취득해야 할 자격증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는 남편은 목발이나 지팡이를 짚고 시험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라 항상 내가 동행하며 보조를 해주었다. 목발을 짚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격려의 마음이 교차하여, 시험 시간 동안 기다리는 차 안에서 눈물지었던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남편은 자격증을 취득하고 비상대비업무담당자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한 번에 이루어지면 얼마 나 좋을까?! 준비 기간의 부족과 높은 경쟁률로 인해 비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괜찮아요. 준비 기간도 부족했고 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는 하늘의 뜻일 거예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 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남편도 허탈감과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인생 2막을 시작하였지만
이후 남편은 전역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2개월여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교육 기간 중 ISO(국제표준화기구) 심사원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걸로 전역 2개월 만에 ISO 인증심사 업체에 취업하였고,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련 업계 특성상 심사를 위해 전국의 기업들로 출장을 자주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체력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보니 출장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그러다 취업 7개월 무렵, 업무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남편이 심사와 컨설팅을 담당하던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탄소중립과 자원선순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장 제의를 받고 전역 후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을 하였다.
두 번째 직장에서 남편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와 임직원 간의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다. 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이 원하는 목표를 원활히 달성해 내었고, 기업에서도 많은 지원과 기대감을 표했다. 그렇게 1년여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이어갈 무렵 남편이 진지하게 이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비상대비업무담당자 선발시험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고.
사실, 남편은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뚜렷했다. 20여 년을 군에서 경험하고 본인이 느꼈던 가치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군문을 나왔으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으로 비상대비업무를 계속 동경해 왔었다. 하지만, 비상대비업무담당자는 공석이 나와야 지원을 할 수 있고, 경쟁률 역시 상당히 높은 선발시험이었다. 시험 범위 자체가 방대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한 시험이다 보니 막상 쉽게 도전해 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더욱이 한 번의 고배를 마셨던 상황이라 불확실성이 더욱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에 시간이 허락할 때면 틈틈이 집 근처 도서관을 이용하여 공부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하면서 공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 우리 남편 꽃길만 걷기를!
올해 3월 25일, 행정안전부에서 선발시험 공고가 있었고, 남편이 기다렸던 공석이 나왔다. 남편은 직장에 양해를 구하여 4월 1일부로 퇴사를 하고, 곧바로 독서실을 등록하여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공부에 몰두하였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저녁 한 끼 식사하러 오는 남편을 위해, 부족한 솜씨이지만 건강을 유지하고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식단을 찾아가며 저녁을 차려주려 노력했다. 사실, 남편을 도울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에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게 남편의 시험 준비 기간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과천분원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혼자 시험을 보러 간다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힘이 되어주고 싶은 생각에 함께 동행하였다. 5월 18일 토요일, 시험장소에 도착하니 햇살과 풍경이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남편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나는 시험장 주변 동산을 거닐다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였다. 우리 가족에게 꼭 행운이 따라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틀에 걸친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비선에 대한 부담감과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상당했다.
시험 준비를 했던 시간보다 시험 후 결과를 기다리는 2주의 시간이 남편과 나에게는 더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2주 동안 매일 저녁 식사 후 남편과 함께 걷기 운동을 하며, 근처 절을 찾아가 기도를 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2024년 6월 3일. 드디어 발표일. 직장을 다니던 나는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편 역시 집에 있기가 초조했는지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아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10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 “여보!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그리고 너무 고마워.” 남편이 2024년 상반기 비상대비업무담당자 선발시험에서 해당 계급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은 순간이었다.
2020년 남편의 사고 이후 4년, 그리고 2022년 남편의 전역 이후 2년이라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편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흐르는 기쁨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우리 남편 꽃길만 걷기를!
전역을 앞둔 군인분들과 가족분들 역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믿고 가족과 함께 헤쳐 나아간다면 반드시 더욱 멋진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군인의 아내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현역 군인분들과 군인 가족분들의 희생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헌신과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 국가보훈부와 제대군인지원센터 등 관계자분들의 노고에도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가대표! 대한민국 국군과 가족분들의 앞날에 꽃길만 가득하기를 응원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