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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JOB 굿 LIFE

실패와 역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도전

2022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공모전 장려상(요약본)

김경화 예비역 육군 중사

굿 JOB 굿 LIFE

‘안 되면 되게 하라’
20대 나의 청춘 시절은 지금 생각해보면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1994년 5월 여군학교에 입교하여 20주간에 걸친 교육을 마친 후 육군 특전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여군이 특전사로 간다는 것은 707특수임무대대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대테러팀 최정예 요원이 되기 위한 각종 특수 훈련을 받으며 강한 정신력으로 다져진 유일무이한 특전 여군이 되었다. 특히 특전여군들 사이에서 사격왕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던 중 20대 중반에 헌병 수사관으로 근무하던 남편을 소개로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부부군인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출산휴가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60일 이외에 육아휴직이 따로 없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아이를 키우며 특전사에 근무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12년간의 군 생활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준비 없는 시작은 위험하다.
군복을 벗었지만 군에서 활동적으로 생활하던 내가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도전과 열정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나는 전역 한 달 만에 성남시 분당에 피부관리실을 개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다. 특전 여군이었던 사람이 그것도 피부관리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격증도 없는 내가 한 달 만에 피부관리실 대표이사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열심히 하면 다 성공할 줄 알았지만, 사전 준비가 부족했던 사업이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2년 동안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다가 임차료와 인건비 등을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접게 되었다.

경력단절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다
‘30대 후반의 특수부대 출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계속 이런 생각으로 나를 나락으로 빠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구직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군 경력을 활용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군을 찾다가 마침 서울역에 있는 신한은행 본점 청원경찰에 입사 지원을 했다.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특전사 출신의 무술 유단자라는 점, 업무 수행에 대한 태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합격한 것 같았다. 생활하면서 인정도 받았고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심리적 안정도 되찾아 갔다. 그러던 중 남편이 준위 시험에 합격하였다. 축하할 일이었지만 진급 후 전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아쉽게도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수험생 엄마에서 다시 시작한 구직 활동
딸의 고등학교 진학 시기와 맞물려 남편을 강원도에 남겨두고 1년 먼저 서울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를 위해 수험생 엄마로 살았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중년의 취업문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야말로 이 시기에는 그저 마트나 식당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딸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또 다른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게 되었다. 취미로 뭔가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알아보던 중 ‘앙금꽃 떡케이크’ 과정을 알게 되어 배웠다. 팥앙금으로 꽃을 짜서 떡 위에 장식하여 떡케이크를 만드는 건데 역시나 재미있고 성취감도 있었다. 열심히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그러다 보니 일자리와 연계되어 바로 프리랜서로 문화센터와 중학교에서 방과 후 강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해야 하는 군인가족이 한곳에 정착하고, 직장생활을 이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온라인으로 일을 찾다
4차 산업혁명 변화의 시기에 맞춰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직업을 갖고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튜버가 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찾아 교육을 받고 유튜버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채널명은 고민 끝에 ‘특전 언니’로 정했다. 되든 안 되든 혼자서 휴대폰 하나로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도 혼자서 해냈다. 유튜브는 콘텐츠가 중요하다. 일단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부터 하기로 하고 사격 영상을 찍어 올렸다. 사설 사격장에서 권총 사격 속사 15발 모두 10점 과녁에 명중시킨 영상은 조회 수가 4천 회가 넘었다. 참 신기했다. 나에게도 구독자가 생기다니…. 심장이 다시 뛰고 동시에 잃어버렸던 자신감과 자부심 등이 샘솟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사무국장직으로 재취업에 성공하여 보람을 갖다
어느 날 특전 여군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역 준사관인 선배는 35년 정년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만에 듣는 선배 목소리는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여전히 반가웠다. 대화를 나누던 중 제대군인지원센터 홈페이지 채용정보란에서 보았다며 ‘재향군인회 사무국장직’에 한번 도전해 볼 것을 권했다. 그동안 남성 영관장교 전역자들이 주로 근무하던 자리였기에 경쟁률이 꽤 높았다. 면접이 끝나고 며칠 후 전화가 걸려왔다. “김○○님! ○○구 재향군인회입니다. 이번에 응시하신 사무국장직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소식이던가? 번번이 남편의 발령으로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하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다시 시작하기가 두려웠기에 합격 소식은 나를 또다시 가슴 뛰게 했다.
오랜만에 내 책상이 있는 사무실로 출근을 하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영리단체로서 민간보조금, 건물임대세입자 관리와 소방안전관리, 안보/전적지 활동, 회계결산, 정회원 관리, 그 밖에 상급 본회 업무, 어르신 봉사 활동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3개월 동안 야근은 기본이었다. 그 모든 일을 잘 이겨내고 어느덧 사무국장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사실 이곳에 취업할 때 일이 너무 버거워 못 해내고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지만, 그 이상으로 해냈기에 상급회에서도 여군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고 다른 구에서도 여성 제대군인이 사무국장으로 취업되며 여군들의 취업문을 여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그 또한 뿌듯했다. 그래서 난 또다시 도전하며 미래를 꿈 꾼다.

우연한 상황이 감사한 일로 되돌아오다
내가 이곳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채용 정보와 선배의 조언, 실패에도 다시 시작했던 그동안의 작은 노력들이 모인 결과다. 며칠 전 제대군인지원센터를 다녀왔다. ‘그동안 센터와 꾸준히 연결되었었다면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뒤늦게나마 제대군인지원센터를 찾아 나를 지원하는 전담 상담사와 상담을 했다. 그리고 전역 후 우여곡절을 겪었던 나는 부끄럽지만, 뒤에 오는 제대군인과 함께 나누고 싶어 용기를 내어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를 쓰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고맙고, 또 감사한 마음으로 밀려온다.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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