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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전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의 소설에서 제목 차용

이치호 예비역 육군 소령

2025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위대한 전환

나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목적지를 벗어난 적 없이, 장교로서의 삶에 누구보다 만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에도 끝이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 발을 디뎠을 때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이 순간조차 분명 예정된 과정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맞닥뜨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과정은 내게 분명 시련이었지만, 그 시기를 통해 한 걸음 성장할 수 있었다. 마치 수십 번의 담금질 끝에 완성되는 잘 벼린 칼처럼.

내게 맞는 옷을 벗어야 했던 순간

장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건, 나의 의지라기보단 아버지의 오랜 꿈에 가까웠다. 군인인 아버지를 보며 자라온 삶의 방식 때문인지,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시작한 장교 생활은 내게 무척 잘 맞는 옷과 같았다.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 조직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동료애와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하는 책임감마저 좋았다. 하지만 전역을 해야만 할 때가 왔고, 나는 일찌감치 전역 후 진로를 정보 분야 경력직 군무원으로 결정했다.
일 년여가량의 시간 동안 군무원 시험을 차근차근 준비했고,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한 내게 찾아온 것은 보안 분야 경력직 군무원 한 명 선발이라는 공고였다. 75:1의 경쟁률, 보기 좋게 불합격하고 말았다.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된 순간이었으며, 생각지도 못한 실패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가장의 몫을 짊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실패에 충분히 괴로워할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내 머릿속에는 하루라도 빨리 취업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거듭된 실패와 단련의 나날들

나는 국회 사무처, 대법원 비상대비업무자 등 매일 나라 일터 구인란을 들락거리며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와 직무계획서를 작성하며, 단 하루도 시간을 허투루 써 본 적이 없다. 해당 공기관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며 각 조직의 체계, 목표, 언론 보도와 기관장의 인사말까지 외웠다. 하지만 마치 눈앞의 신기루를 좇는 것처럼 매번 1차 서류전형은 통과했으나 2차 면접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나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자책했고, 거듭된 실패는 나를 점점 더 위축되게 만들었다. 땅에 떨어진 자신감을 끌어올려 줄, 좌절의 경험을 딛고 일어설 동기가 필요했다. 때마침 서울 제대군인지원센터에서 경비협회와 MOU를 맺고 전역 군인 대상 특수경비교육대상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 할은 기세’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특수경비교육은 내게 팔 할의 기세를 다시 채우는 동기였다.

나는 마치 고시라도 임하는 마음으로 2주간의 특수경비교육에 성실히 임했다. 고작 2주간의 교육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라는 당연한 법칙을 상기시켜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교육성적 우수자로 상장까지 받으며, 자신감이 향상되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 교육을 계기로 나를 연마하는 노력을 이어갔다. 소방안전관리 1급, 지게차 기능사, 워드 1급 등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며, 나의 구직카드에는 자격증과 함께 자신감도 늘어났다.
하지만 늘어나는 자격증의 개수만큼 나의 취업 성공률이 높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시청, 강원도청, 공기업 등 여러 곳에 지원서를 제출하였으나 한결같이 서류전형을 통과하고도 면접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수차례의 구직 동안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면접이었다.
번번이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나는, 누구보다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리고 이 도움 요청에 기꺼이 응해준 분들이 바로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전담 상담사님이었다.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어느 면접학원보다 더 전문적이고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으며, 지원할 때는 응원의 말을, 실패하면 아낌없는 격려의 말로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처음 취업을 하게 된 곳은 평택 항만청 예하 특수경비업체였다. 입·출입 통제업무를 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근무는 보통 2인 1조로 편성되는데, 나의 파트너는 팀장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군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시스템의 개선 사항을 건의한 적 있었다. 본사에서 내 의 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팀장은 이전과 다르게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야간 근무 시에는 나를 새벽 시간에 고정 편성하고, 업무 이외의 청소 등을 추가로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군에서 영관장교로 근무했는데 이런 것도 못하냐는 식의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주변인들이 보는 곳에서 자신이 영관장교 출신보다 상급자라며 걸핏하면 나를 깎아내렸다.
이처럼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새롭게 시작한 두 번째 삶을 이렇게 고통 속에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결국 가족들의 권유로 일을 그만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운이 좋게도 또다시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집에서 가까운 파주에 있는 지역난방공사 산하의 보안팀에 취업하였고, 안정된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직장에서 겪었던 일 때문이었을까? 직장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와 전혀 다른 삶의 이력을 가진 부서 인원들임에도 서로의 다름을 시기하는 대신 각자의 경험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처럼 가까워졌고,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전하지 않는 안정되고 편안한 삶은 나에게 또 다른 갈망을 느끼게끔 했다. 특히나 정기적으로 국가 중요시설 방호 관련 군·경 통합 훈련을 하곤 했는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군복을 입고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주변의 좋은 인연들 덕분에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가장 처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것은 제대군인지원센터 상담사님이었다. 나의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며, 지금까지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무원에 다시 도전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서 격려해 주었다.
보안팀 동료들에게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고 말하자, ‘당신은 여기서 근무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나의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심지어 동료들은 조금이라도 공부에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도록 근무 시간을 조정해 주거나,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휴식 시간에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교대 시간을 놓친 적이 있었다. 한참 뒤에야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달려갔는데, 다른 인원이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물었더니,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대신 근무를 서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동료들은 본인들이 먹으려고 사 두었던 영양제나 간식까지 챙겨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믿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주변의 지지와 간절함은 예전보다 더 공부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당시 집중하기 위해 독서실을 다녔는데, 대부분이 수험생이었다.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이 공부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일까? 독서실 원장님은 내가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었다. 1인 실에서 공부했는데, 집중이 안 되면 언제든지 개방실로 옮겨서 공부해도 좋다며 먼저 말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커피나 간식을 챙겨 주거나, 볼 때마다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자신은 독서실을 오랜 기간 운영하다 보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합격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하며, 나는 꼭 합격할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많은 사람의 격려와 응원을 발판 삼아 엉덩이에 진물까지 나올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독서실에는 합격자의 이름을적 어놓는 게시판이 있는데, 매일 독서실을 나설 때마다 그 게시판을 보며 언젠가 내 이름 석 자를 이곳에 붙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8개월간 공부를 하여 2023년 4월 예비전력군무원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시험 합격 후에 음료수를 사 들고 독서실을 다시 방문했을 때, 게시판에 쓰여 있는 내 이름 석 자를 보고 울컥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옆에서 제 일처럼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늘 곁에서 마음의 안식이 되어준 가족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던 제대군인지원센터, 응원과 격려로 힘을 주었던 직장 동료들과 독서실 원장님까지. 인생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그 모든 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힘든 시기를 나 혼자서 오롯이 견뎌낸 것 같지만, 좌절과 실패의 순간에 나를 도와준 이들이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있었기에 도전 할 용기를 얻고 힘든 시기를 잘 견뎌냈던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쁨 속에 살다

지금 나는 전남 목포에서 5급 사무관의 신분으로 훈련대 훈련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다시금 내게 꼭 맞는 옷을 입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훈련대에는 매일 200여 명의 예비군이 들어오고, 나는 그들의 예비군 훈련을 총괄하고 있다. 훈련이 시작되면 그들 앞에 서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안보 교육을 한다. 비록 군인 신분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지역 내의 통합방위태세 확립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나의 사명이며, 진정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직업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기 마련이고, 그 위기를 극복해야만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그리고 내게는 그 위기의 순간에 가족이 있었고, 동료가 있었으며,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두 번째 삶을 설계하고 한 걸음씩 새로운 길을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내 주위에도 인생의 위기에 맞닥뜨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역을 앞둔 후배나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면 나의 실패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멘토가 되어주고 싶다.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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