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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전환
군인에서 또 다른
호국이가 되다
임종현 예비역 육군 중사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2024년 제대군인 취·창업 성공 수기 공모전 장려상

서기 1992년 3월 17일 17시
(성장과정 및 학창시절)
화목한 가정 속에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따뜻한 보호 속에 무럭무럭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개 살면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세상에 대해 배우고 익혀나간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직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군인이었다.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국군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처음에는 장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학업이 너무 어려웠다. 중학교까지는 보통 이하의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지만 이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수능 성적도 좋지 않아 갈 수 있는 대학교가 지방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우리 집 어머니가 가장이셨는데 미화 일을 하셔서 가정 형편도 항상 좋지 않았다. 군대 영장이 나오면 바로 입대를 하려고 했다. 아버지도 방위 출신이셔서 군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없었는데 인터넷으로 군 관련 취업을 알아보는 도중에 우연한 계기로 부사관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응시하게 되었다. 필기시험은 문제집을 2권을 사서 정독하고 하루에 4시간씩 공부했고, 2시간씩 체력시험을 준비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가장 간절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약 4개월간 모든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육군 하사로 임관했다. 이때가 서기 2011년 10월 1일 20살이었다.
서기 2011년 10월 1일~2018년 9월 30일
(호국정신의 군시절)
아직 어렸던 나는 초임 하사 때 군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업무도 잘하지 못했었다. 부대 내에서 평가도 물론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항상 성실하게 임무에 매진했고, 주특기 관련 교범도 계속 정독했고 체력관리에도 항상 신경을 썼다. 2년 차부터는 군 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타 전우들보다 느렸던거 같다. 그렇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그 결과 다른 간부들보다 주특기도 많이 알게 되었고, 부대생활도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중사로 진급하고 멋지게 군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런 나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의 병환이 심해지셔서 오래 사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집은 경기도권이었고 나는 당시에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셨다. 자식이라곤 나 혼자였기 때문에 내가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인생이 너무 막막했다. 아버지가 걱정되었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업무는 했지만, 집안 걱정으로 어떻게 일했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다. 이때 인사과 고참 선배에게 문의하게 되었고, 도움을 받아 재해부사관 승인이 사령부에서 내려와 나는 연고지 근처에 있는 부대로 전출을 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퇴근 후 아버지 병환을 살피고 간호했으나 끝내 운명을 막지 못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지금도 쓰리고 아프다. 이전에 복무연장에 선발되어 긴 시간 복무를 했지만, 장기복무 지원은 하지 않았다. 군 생활이 아쉽고 섭섭했지만, 부모님을 부양하고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서기 2018년 10월 1일 ~ 2021년 12월 31일
(새로운 인생의 시작)
그렇게 군 생활을 마감하며 새로이 취업준비에 매진했다. 정말 쉽지 않았다. 군대에서 산업체 전형으로 효충사관학을 전문학사로 졸업했고, 자격증으로는 사회복지사, 무도 3단, ITQ 전산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 학교 경찰학전공에 편입하여 3학년을 마친 상태였으나 다른 취업준비생들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취업이 쉽게 될 거 같았지만 응시원서 넣고 연락 오는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갓 사회초년생이 된 나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살아야 될지 고민이 많았다. 구직 사이트, 제대군인 중기복무 취업연계센터, 시청 취업지원센터의 도움도 받아 취업을 준비했다.
일단 자격면허로 쓸 수 있는 것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었고, 사회복지사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사도 약자를 보호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일이기에 좋았다. 성향은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중기복무를 한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경력을 인정받는 것이 보수도 좋고 군 생활과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 업무적으로 효율도 더욱 잘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사 직종으로는 청원경찰과 방호직공무원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잘 맞을 것 같았다.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소했고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청원경찰은 일반경찰과는 달랐는데 통합방위법에 따라 국가보안시설에 배치되어 경찰관직무집행법에 의한 최소한의 시설(청사) 경비업무를 하는 직업이다. 과거 공무원 신분에서 현재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직, 공공기관에서는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으로 분류된다. 청원경찰 경비기준액이 일반경찰관과 유사한 봉급을 받을 수 있고, 국가 또는 지자체 소속은 공무원 연금, 각종 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방호직공무원은 청원경찰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지만, 경비업무 관련하여 경찰관의 권한은 없었고, 공무원이기 때문에 군 복무의 연장선과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국가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군인으로서의 아쉬움도 한몫을 했다.
사회복지사를 하며 온라인 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 직종을 결국 그만두고 새롭게 꿈을 꾸며 시작했다. 졸업 이후 대학원에 진학했고, 학비가 학기당 5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부담되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과 경력을 쌓기 위해 경비원 채용에 지원했다. 게다가 경비원의 경우 만약 청원경찰이나 방호직공무원으로 임용되었을 때 관련 법령과 기관의 임용기준에 따라서 전부 또는 일부가 경력으로 인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도 있었고, 대학원의 경우 야간수업이었기 때문에 교대근무를 하는 직종을 해야 학업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던 중 경비원 채용시험에 합격했고,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근무가 아닐 때는 학교 수업에 참여했다(휴무, 주간근무 때). 그러면서 계속 청원경찰 채용시험이 있을 때마다 응시원서를 넣었고, 수십 번 서류에서 낙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4번의 최종 면접시험까지 갔었고, 결국 합격하게 되었다. 정말 기뻤다. 필기시험, 체력시험, 면접시험을 다 통과하고 공개채용으로 붙었기 때문에 정말 값진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큰 꿈을 갖고 임용 등록하고 즐겁게 회사에 다녔다. 1년이 됐을 때는 조장으로 선발되어 근무했다. 청원경찰은 조원 조장 반장 대장의 직책이 있었는데 각 직책에 맞는 견장을 착용한다. 좀 더 책임감 있게 근무했고 즐겁게 일했다. 별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일을 하며 연고지에서 근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셨고, 교대근무가 일반근로자보다 휴일 수가 많다고 생각했지만, 근무패턴이 좋지도 않았고, 휴무 때마다 이동해서 어머니도 챙겨드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이직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같은 청원경찰 또는 방호직공무원으로 말이다. 우선은 스펙을 좀 더 보강하기로 했다.
청원경찰이 되기 전, 되고 나서도 계속 자기계발은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근무교대하면 도서관도 가고, 업무이후 식사시간 및 휴게시간에는 계속 공부했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타지에서도 근방 체육관을 다니며 단증도 승단하려고 주기적으로 노력했다. 무도단증, 국가공인 신변보호사, 한국사, 소방자격증 3가지, 무선통신사, 응급처치강사,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등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취득하고 보강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도 시간이 날 때 다듬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청원경찰 및 방호직공무원의 직무를 매뉴얼 식으로 만들고 이미지트레이닝도 해보고 그랬다. 하지만, 이 직종도 레드오션(경쟁자가 많아 포화상태가 된 직종)이 되어있었다. 유사한 스펙으로는 경쟁이 힘들었다.
고점의 가산점을 취득할 수 있는 경비지도사, 응급구조사 자격이 없었기에 부족했지만, 다른 자격증과 스펙을 과감하게 버리고 경비지도사에 올인해서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절대평가의 시험으로 현재 기준으로 2~3문제를 틀려야 합격할 수 있는데,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날의 컨디션과 운만을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게 받은 점수가 80점이었기 때문에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응급구조사의 경우 휴직을 하고 교육기관에 위탁하여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일을 하지 못하고 타지에서 공부하며 마이너스로 생활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 준비하지 못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회사를 꾸준히 다니기로 하면서 늦게라도 연고지로 가겠다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 생활로 취업 관련 수업을 듣던 지인에게 연락을 받게 되었다.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회사의 보안직공무원을 준비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지인도 그쪽에서 보안직공무원으로 일했는데 규모가 상당히 컸고, 군경력에 대한 인식도 좋았기 때문에 도전해 보라는 연락이었다. 이분 덕에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직종인지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전국 단위의 기관이 있었기 때문에 연고지로 갈 수 있어 지원하게 되었다. 최종 면접을 보고 떨어질 줄 알았다. 청원경찰 이후 여러 곳에 응시했으나 합격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잘했을까? 이건 잘못한 것 같고 다음에 다시 준비해야겠지?’ 생각했다. 합격자 발표날 조회 결과 최종 합격이었고, 이직에 성공하게 되었다.
서기 2022년 1월 1일 ~ 현재
(호국이로의 새로운 인생)
새 기관에 합격하고 퇴사 처리 및 인수인계를 모두 정리했다. 공무원증을 새로 발급받고 정말 기뻤다. 지인에게도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작게나마 선물로 보답했다. 진정한 경비, 보안요원이 된 것 같았다. 다들 부러워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니 꿈만 같다. 현재는 근무하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기계발을 아직 놓지 않고 있다. 살다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정년퇴직 이후의 새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다. 유사한 업무를 하며 국가에 보탬이 되는 호국이가 된 것 같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군인정신, 간부로서의 생활은 내 인생의 전부였고, 또 다른 꿈을 펼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예비역이지만, 항상 정규군처럼 국가수호를 위해 생활하고 생각할 것이고, 언제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먼저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려고 한다.
마을 사랑방 자밭농기계센터
농기계센터를 운영한 지 2년이 되어 간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 되었다. “강 사장! 나여. 바께스 하나 놓고 가. 복숭아가 참 맛나드라고.”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읍에 가는 길에 먹어보라고 센터 앞에다 복숭아를 두고 간다는 전화였다.때로는 농기계를 싸게 잘 고쳐주었다며 사과를 한 광주리 가져오는 손님도 있다. 좋은 거 못 주고 못난이 사과를 줘서 미안하다며 웃고 간다. 봄철이 되면 지나가다 들렀다며 고로쇠 물을 한 통 가득 가져오기도 하고 더운데 고생한다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는 손님도 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옥수수를 몰래 놓고 가는 어르신도 있다. 자밭농기계센터 커피가 먹고 싶다며 놀러 오는 어르신들에게는 따뜻하고 시원한 커피를 드리기도 한다.
논밭으로 출장을 가면 점심을 먹고 가라며 된장찌개에 풋고추만 내놓는 어르신도 있다. 없는 반찬이라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시부모님 생각이 날 때도 많다.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껏 표현해 주는 동네 분들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자밭농기계센터는 작은 시골 마을에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주는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소통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농기계 수리하는 일은 힘들고 고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편은 힘닿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즐겁게 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나도 흐뭇하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아직도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즐거운 마음이 있어 행복하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 남편이 멋지고 자랑스럽다. “강 사장! 여기 신주골이여. 언능 와!”
트랙터를 잘못 작동했던 임씨 할아버지다. 자밭농기계센터 최고의 고객이 되었다. “네! 지금 바로 가요.”
남편은 오늘도 무거운 공구 가방을 들고 짱짱한 햇볕이 내리쬐는 밭으로 달려갔다. 햇빛에 반짝이는 낡은 트럭은 털털거리며 쌩쌩 달려간다.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