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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산책

광복 80주년 계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편집실

제4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고급) 42번 문항

다음 선언서가 발표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본 국민 대표 회의는 이천만 민중의 공정한 뜻에 바탕을 둔 국민적 대회합으로 최고의 권위를 지녀 …… 독립을 완성하 기를 기도하고 이에 선언하노라. …… 본 대표 등은 국민이 위탁한 사명을 받들어 국민적 대단결에 힘쓰며 독립운동이 나 아갈 방향을 확립하여 통일적 기관 아래서 대업을 완성하고자 하노라.

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⑤ (마)

지식 산책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정답] ①번

국민대표회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인 1923년에 개최되었으며, 외교 중심 임시 정부 활동의 한계가 드러나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볼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의 구심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설립된 망명정부입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소앙을 비롯해 당시의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밤을 새우는 마라톤 회의 끝에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합니다.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알려 독립 정 신을 일깨우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무장 투 쟁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 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록 국내에서 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 지를 알리고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앞쪽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앞쪽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초의 대한민국 헌법 문서,
대한민국 임시헌장 발표

대 한 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 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본 원칙과 국민의 권리를 명시 했습니다. 이 헌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으로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제’로 규정하였습니 다. 당시 임시헌장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없이 일체 평등함’ 을 명시하며 평등권을 헌법의 중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즉 국민주 권을 실현한 최초의 대한민국 헌법 문서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 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의 꿈을 구체화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의 법통을 명문화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적 유일성을 갖습니다.
이 헌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주의 원칙과 국민의 기본권을 천명함으로써, 향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일제강 점기하에서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침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광복 후 지난 80년 동안 9차례의 헌법 개정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우리나라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다.’는 여전히 가슴을 웅장하고 뜨겁게 만듭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국민대표회의와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

독 립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 부지만, 초창기부터 재정난과 지도층의 이념 차이로 인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정부의 개혁 과 독립운동 방향성을 논의하기 위해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 의를 소집하게 됩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125명이 모여 독립운동의 조직과 노선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자는 ‘고수파’와 기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 기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 로운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까지 3개의 진영 이 형성되었습니다. 고수파는 하와이의 이승만으로부터 원격 지휘 를 받는 기호세력 위주였고 개조파는 안창호, 김동삼, 여운형, 윤자 영, 김철수 등 민족주의자와 일부 사회주의자 중심이었습니다. 창 조파는 신채호, 박용만, 김만겸, 문창범 등 사회주의자와 일부 민족 주의자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이러한 의견 차이로 인해 국민대표회 의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결렬되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 세력 간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독립운동의 방향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민 족운동 세력 간의 협력과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중심의 강력한 지도체제로 개편되 었고, 한국독립당 결성(1930) 및 한국광복군 창설(1940) 등의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개조파 대표 인물 안창호

개조파 대표 인물 안창호

창조파 대표 인물 신채호

창조파 대표 인물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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