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June Vol.184
헨리 포드(Henry Ford)
19세기 후반, 토머스 에디슨이 운영하는 전기회사에는 괴짜 기술자가 있었다.
자유시간이면 쉬는 대신 자동차를 설계하고 에디슨에게 자신의 디자인을 보여줬다. 별 반응이 없자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다.
두 번의 파산을 겪고 설립한 세 번째 회사에서 내놓은 자동차는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지구상의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인생의 주인이 된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다.
글. 윤진아 일러스트. 비올라
참고. <헨리 포드>(21세기북스)
헨리 포드는 1863년 미국 미시건 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주민 모두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소년은 도무지 농사에는 흥미가 없었고, 기계를 보면 눈을 반짝이곤 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디트로이트로 간 소년은 15세에 기계공이 되었다. 열여섯 살이었던 1879년에는 작은 기계제작소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내연기관 제작을 배웠다. 열여덟 살에는 에디슨 전기회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했고,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수석기사로 임명됐다. 34세 때는 그가 고안해낸 엔진을 본 토머스 에디슨의 격려도 받았다. 자신이 평생 존경해온 인물에게서 인정받은 헨리 포드는 뛸 듯이 기뻐했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자동차 생산에 돌입했다.
집 뒤편에 마련한 작업장에서 내연엔진 연구에 몰두한 헨리 포드는 1895년 타이어를 사용한 4륜 구동 자동차를 개발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인 1903년에는 동업자와 자본금 10만 달러로 회사를 차리고, 부사장 겸 선임엔지니어 직책을 맡았다.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바꾼 ‘포드 자동차’의 출발점이었다.
1908년, 헨리 포드는 “앞으로 포드사에서는 오직 T형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며 “포드 상표를 붙인 자동차는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성능을 갖게 될 겁니다”라고 선언했다.
이 같은 결정에 가장 환호한 사람들은 경쟁사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망하려고 작정했군!”이라고 조소했다. 당시 자동차란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망할 작정을 한 것으로 치부되던 헨리 포드는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동차는 소수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반 대중에서 고객을 찾은 헨리 포드는 입버릇처럼 “5%가 아니라 95%를 위한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헨리 포드는 이 문제를 ‘생산공정 단순화’로 해결했다. 오직 T형만을 생산하기로 하며 생산 공정을 표준화하고, 1911년부터는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했다. 이로써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그만큼 가격도 저렴해졌다. 덕분에 포드의 T형 자동차는 사상 최초로 연간 1만 대 판매를 돌파했고, 날로 기세를 더해 1911년에는 3만 대, 1913년에는 10만 대를 넘어섰으며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T형이 생산됐다. 얼마 후에는 지구상의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포드의 T형으로 채워졌다. 미국을 넘어 세계가 ‘마이카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소수의 부유층에만 허락되던 자동차를 만인의 생필품으로 대중화한 헨리 포드는 현대식 생산공정 혁신의 대명사인 ‘포드 시스템’을 도입하며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전체 공업의 역사를 새로 썼다. 미국의 작가 윌 로저스는 “헨리 포드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은 헨리 포드의 여러 단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야말로 진정한 자립을 실천해 자신과 세상을 바꾼 인물이었다는 데는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모든 시련을 감수했던 헨리 포드의 삶을 들여다보면 “상황에 체념하고 도움을 요구하는 대신, 자신이 지닌 고유한 가치에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라!”라고 독려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