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my Life
굿 JOB 굿 LIFE
육군 예비역 중사가
인공지능이요?
김일구 예비역 육군 중사
2023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공모전 우수상 (요약본)
육군 중사 + 인공지능 = ?
“오빠, 일단 사과부터 할게. 오늘 모임에 나갔다 왔는데, 요새 남편 뭐하냐고 물어봐서 오빠가 직업군인 그만두고 AI 한다고 말했거든. 거기서 사람들이 AI로 무슨 일 하느냐고 다시 물어봤는데 갑자기 너무 어려워서 설명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사람들이 다 오빠 백수인데 내가 둘러댄 건 줄 알아. 미안.”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저는 백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합니다. 81㎜ 박격포병 1년 2개월, 방공부사관(발칸) 9년, 특임보병 2년, 도합 12년 2개월……. 컴퓨터의 ‘컴’ 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던 직업군인이 어떻게 AI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요. 여러 회사에 지원할 때마다 빠짐없이 답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서 AI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고자 합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역
4년 전만 해도 저는 전역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도 “우리, 군인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 지역에 남아서 오래오래 쭉 살자.”라고 설득했으니까요. 이렇게 감언이설로 꼬여내어 어떻게든 아내와 혼인을 하긴 했으나 점점 저를 조여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후방 교류였지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차에 제 눈에 특임보병 공고가 들어왔습니다. 특임보병으로 지원하면 2작사 예하부대에 남을 수 있다고 하니 “결혼해도 이 지역에 살 수 있다고 하더니, 이것은 사기 결혼이다.”라며 펄펄 뛰던 아내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 것이었죠. 그렇게 저는 가장 무서운 아내를 뒤로 한 채 과감히 특임보병에 지원하게 되었고, 발톱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빠질 만큼 기존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사건이 불쑥 터지고 말았습니다. 네, 여러분이 예상하는 코로나 사태입니다. 코로나로 휴가 나가기가 힘들어지면서 저는 주말부부에서 석 달에 한두 번 만나는 분기별 부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상황이 급변하면서 2작사 예하부대에 남을 수 있다고 보장하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저를 말렸습니다. 당시 코로나 사태로 인해 경기는 극악으로 치닫고 있는 데다가 저는 상사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당시 저는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군인이라는 안정성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군대에서 나오겠다는 제 말에 아내와 장모님이 제 의견을 존중해 주긴 했으나,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 되면 쿠○맨 하면 돼요.” 라는 제 말에 항상 저를 백년손님처럼 대하던 장모님은 처음으로 제 등짝을 때리셨습니다. 그만큼 걱정이 태산 같다는 표현이었겠지요. 저는 저를 믿고 따라주는 제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길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저 자신과의 사투를 시작했습니다. 10년 이상 복무한 제대군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자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인 직보반 기간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제대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에게 생활고를 안길 수는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저는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행렬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한 통계까지, IT와 관련 있는 개념이라면 중학교 교과서까지 살펴보면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서적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마음으로 인생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습니다.
직보반 기간에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많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마땅한 정보도 없었으며 주위에 이 길을 먼저 가본 선배도 없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저를 도와준 건 제대군인지원센터였습니다.
저는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양질의 직업 교육 과정이 편성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상담 선생님께서 항상 자기 일처럼 여러 가지 취업 정보를 알아보시고는 좋은 정보가 있으면 곧바로 전화로 알려 주셨습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취업 상담을 하던 중에 제가 IT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고용노동청에 요청하여 국비 지원으로 인공지능 과정 부트캠프에 참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당시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는 인공지능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육기관에서 제가 사는 지역에 처음으로 인공지능 캠프를 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역 부트캠프 1기 학생이 되어 양질의 AI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놓칠 뻔한 귀한 기회였습니다.
군에서 배웠던 리더십으로
저는 인공지능 캠프에 참여하면서 제 실력을 가늠하고자 공모전에 도전하였습니다. 팀을 꾸려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관련 대회로 유명한 캐글에 도전하였지만 역시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결과는 아쉽게도 순위권 밖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군에서 배웠던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좌절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팀원을 모집하여 통계청에서 주최한 인공지능 활용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저는 전국 대상을 받게 되었고, 난생처음 1등이라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통계청 대회에서 전국 대상을 받았다고 하니 아내는 정말 뛸 듯이 기뻐했고, 장모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엉엉 우셨습니다. 저는 그동안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당장 표현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한동안 아내를 안아주었습니다.
이후 저는 인공지능 교육기관에서 훈련한 학생 중에서 성공적인 사례로 인정받아 교육기관 본사에서 인터뷰 영상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공지능 캠프 막바지에 지금의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공공기관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것들
‘그리하여 저는 스카웃 되어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결말이 나면 삶이 재미가 없겠지요. 저는 서울로 상경하기가 무섭게 대전에 파견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지금도 계속하여 다른 프로젝트를 해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교육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여 수많은 모델을 만들고 문서를 작성하며 사용자들 앞에서 브리핑을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는 다년간 군대에서 수행했던 브리핑, 공문 처리, 보고 등을 바탕으로 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특임보병으로 전환하여 단시간 내에 적응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다들 기피하는 공수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군인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긴 것이 제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직보 기간부터 공부, 취업, 취업 후 첫 프로젝트까지 변화를 위해서 짧은 기간에 쉼 없이 달려온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 시점에 최소한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것은 항상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도와주신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덕이 컸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도 제가 취업했다고 말하니 기쁘게 응답해주시던 제대군인지원센터 상담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습니다. 덕분에 홀로 남겨진 것 같던 시간 속에서도 도움과 격려를 받으며 한발 한발 전진할 수 있었고, 그 노력이 지금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제대군인분들께 병력 관리, 병과 특기 공부, 행정 업무, 훈련, 체력 등 군대에서 쏟던 모든 역량을 자신에게 쏟으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곧 4차 산업혁명 현장에서도 제대군인분들을 많이 만나 서로 이끌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현장에서 먼저 길을 닦아 놓고 있겠습니다. 제대군인 여러분, 파이팅!
※ 본 수기는 개인의 경험으로 정부의 정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본 수기는 지면 관계상 내용이 다소 요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