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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산책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보는 역사와 보훈 지식

대한매일신보와 베델 선생

제5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6번 문항

Q. (가) 신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여기는 양기탁과 함께 (가)을/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전개한 베델의 묘입니다. 그는 “나는 죽지만, (가)은/는 영원히 살려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① 최초로 상업 광고를 실었다.
② 천도교의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③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었다.
④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⑤ 일장기를 삭제한 손기정 사진을 게재하였다.

[정답] ④번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기자 베델이 창간과 운영에 참여하여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비교적 덜 받는 신문이었기에, 효과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 볼까요?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기자 베델이 창간과 운영에 참여하여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비교적 덜 받는 신문이었기에, 효과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번입니다. 이와 관련한 역사 지식을 한번 살펴 볼까요?

일본의 사전검열을 피한 유일한 신문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제강점기 시기인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발행된 독립운동 성향의 신문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양기탁이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창간한 신문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와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강한 비판과 애국 계몽을 주요 사안으로 다뤘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유 중 하나는 일제의 검열을 피해 언론의 자유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양기탁과 베델은 일본 당국의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한글과 한문, 영어로 기사를 게재해 민중에게 사실을 알리고 독립의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또한, 이 신문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했으며, 경제적 자립을 위해 민간의 기부금을 모아 운영됐습니다. 하지만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일제가 강제로 신문을 폐간하고 그 명칭을 ‘매일신보’로 바꾸며 친일 성향의 내용만을 다루게 했습니다.대한매일신보는 특히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고,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항일단체와 연계하여 항일 사상을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기사와 사설을 통해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강력히 비판하며 한국인의 자주성과 애국심을 고취했습니다. 영국인이었던 베델이 대표로 나서 일본 당국의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일본은 끝내 베델을 법정에 세우고 강제 추방하는 등 신문을 억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끝까지 독립의식을 고양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항일 언론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베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영국 언론인으로, 한국 언론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중 한국에 입국하여 일본의 조선 침탈 실상을 알게 되었고, 이를 비판하고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베델은 신문을 통해 일제의 부당한 식민 통치를 고발하고 한국의 자주성을 적극 옹호하며, 민중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과 한문으로 발행되었고,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영문판도 함께 제작됐습니다. 베델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불만을 샀
고, 일본은 그를 법정에 세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추방 압력을 가했습니다. 결국, 베델은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09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의 항일 정신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베델은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로 불리며, 한국 독립의 동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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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하(룩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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