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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펼침

소통을 대하는 자세

글 · 한상권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작가

“소통의 기본 조건은 공감 능력”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의 욕구 5단계 중에서 생리적 욕구, 안전욕구에 이어서 세 번째로 사회적 욕구를 들었다. 이것은 집단 내에서 가족이나 기본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기도 하는데, 군집을 이루고자 하는 본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수만 년을 이어서 지금까지 생존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회활동을 하면서 서로 상호 보완이 가능하고 동시에 전체의 생존 능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사회적 기능의 핵심은 무엇일까.

글을 쓰고 강연을 하다 보니 고민 상담이 나름 꾸준하다. 한 번은 직장에 첫발을 내디딘 회사원이 상사와 동료로부터 일을 못 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 때문에 힘들다고 상담을 요청해왔다. 나는 상황이 쉽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치 그 사람의 상황을 전부 이해한 것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조금씩 말이 많아지고 불필요한 미사여구로 위로하고 가르치려는 본능이 튀어나왔다. 회사원은 잠시 후 “작가님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라는 짧은 한마디를 하곤 주제를 다른 것으로 옮겼다. 고민의 중심을 다루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마음을 열지 않았던, 그저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책을 펴내고 강연을 하고 상담을 한다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자만심에 차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기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식의 불통은 보통 상하관계가 분명해서 탑다운 방식의 의사소통이 주를 이루는 경직된 조직에서 자주 목격된다.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해지면 좋겠다.

소통을 단순한 Communication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소통이라는 보기 좋은 형식을 차용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은 내가 중심이 되어버려 상대와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드는 잘못된 방식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를 중심으로 펼쳐놓은 이야기는 상대의 아픔을 더 자극하기도 한다. 내 이야기만 길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나누는 작업이 생략되어 내 말의 정당성을 찾기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진심은 진실한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는 늘 그렇다. “미안합니다”라고 시작해서 “하지만”으로 사과의 말을 끝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고 싶다는 얘기와도 같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잘못된 신념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대화는 알고 보면 ‘소통’의 양방향이 아니라 ‘주장’의 일방도가 되어 듣는 사람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이런 모습을 꼰대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 그 단어를 대체할 수 있을까. 관계에서 중심은 당연히 내가 되어야 하지만 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도 일리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수용의 용기가 필요하다.

조직 생활에서, 또 인간관계에서 뭘 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기부여 전문가 또는 여러 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성향에서 한 끗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작은 ‘다름’일지라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서의 차이일까 아니면 성장하면서 늘려온 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바로 진심을 나누고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지속의 힘 역시 중요하다. 또 자연스럽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따뜻함, 가족 안에서의 행복감, 그리고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도, 그 모든 것에서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 하나가 바로 꾸준함이듯이 말이다. 사람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진심을 느끼게 된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은근히 해나갈 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도 변변치 않은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활기찬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씩, 그리고 오래갈 수만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환경은 많은 게 변화되어 있을 거라고 믿기를 바란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늘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평소 꾸준히 시간 날 때마다 가꾸어준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원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을 때 가끔 한번 풀을 뽑아내고 잔디를 깎겠지만, 사실 그 과정까지 볼품없던 정원의 모습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는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내려놓기”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생각의 차이를 느낄만한 소중한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지난 여름, 나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일까요?” 그중 한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클로버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씌워 주었을 때가 생생하게 생각나고 행복했어요.” 또 다른 아이는 “산에 올라가다 너무 덥고 힘들어서 근처 개울가에서 신나게 물장구치고 가재 잡던 순간이요.”라고 답했다.

당시 나는 가슴이 시리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다.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의 생각과 어른이 느끼는 행복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른 간에도 많은 생각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엿보았듯이 대화를 한다는 물질적인 현상만이 아닌,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며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고 인정하는 것이 소통의 본질이다. 야구선수들이 경기 시작 전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사인을 정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소통도 상대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바야흐로 소통의 시대가 되었다. 메슬로우가 말한 사회적 욕구가 인간의 소통을 매개체로 한 군집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면, 앞으로는 소통을 통해서 상호 공통분모를 찾아 나가는 공감의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영혼 없이 능력만 뛰어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인성 문제가 불거진 톱스타나 운동선수들, 주변 지인에게서도 간간이 확인할 수 있다. 뛰어난 지식과 언변으로 소통능력을 지녔지만 알고 보면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벽만 확인하는 행위는 소용없는 수고라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

요즘 소통과 화합 그리고 미담에 담긴 이야기들이 다양한 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진심이 담긴 공감 능력은 사람들과의 마음을 자연스레 열게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서로를 이해하는 성숙한 구성원이 되어가는 걸 지켜볼 수 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사회와 서로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신뢰를 쌓을 때 보이는 밝은 에너지를 서로가 확인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진심이 담긴 공감 능력은 사람들과의 마음을 자연스레 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