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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새 인생

행복한 이발사

2020년 제대군인 리스타트 챌린지 수기 당선작

글 · 신명섭 예비역 육군 중위

충청북도 충주 안림동의 작은 마을에서 대가족이지만 여유롭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은 타지역에서 목축업을 하셨고, 나는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공무원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통신 부사관이 되기 위해 군장학생으로 2년제 대학의 졸업과 동시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와 부사관학교에서 훈련받고 2010년 5월에 임관해 발령받은 강원도 철원의 3사단, 백골 부대의 통신대대. 춥고 고된 훈련의 나날이어도 상관으로부터 인정받으면서 업무도 제법 흥미가 있었고 빠르게 적응한 군 생활이 나쁘지 않았지만, 시야가 넓어질수록 부사관으로서의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바란 군 간부의 모습은 장교였기 때문에 2년 복무 후 간부사관에 지원, 훈련을 받고 2012년 12월, 장교로 다시 태어났다. 육군 장교로서 당당한 모습을 할머니께 꼭 보여드리고자 통신학교에서 교육장교로 3등으로 교육을 수료해 당시 투병 중이던 할머니께 보여드리니 기뻐하셨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구 5군수지원사령부에 통신장비 정비소대장으로 발령받아 시작된 군 생활. 장교로서 처음 해보는 업무는 더 정확하고 섬세해야 했고 책임도 커졌다. 그만큼 만족스러웠고 자긍심을 느꼈다. 빠른 업무 파악을 위해 야근도 많이 하고, 소대원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키워준 엄마 같은 존재인 할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얼마 되지 않아 중위가 되었다. 운 없게도 내 보직이 없어져 부산의 53사단으로 이동하게 된다. 많은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던 부대였는데 새로운 보직을 받고 근무하다 보니 ‘어떤 업무를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들과 일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라는 지난날 고참의 조언이 떠올랐다. 보직 특성상 매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많았고, 우천과 낙뢰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간부들의 원망은 통신장교인 나에게 향했다. 업무가 힘들고 어려운 게 아니라 단지 상황이 어렵고 사람이 힘들었다. 참모 소대장으로서 혼자인 느낌이 너무 외롭고 괴로웠다. 다행히도 선·후배 중위들이 있었기에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사업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망설임 없이 4년간 모아온 적금을 모두 보내드리고 여태껏 그래왔듯 나대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 한 푼도 남지 않은 내 상황에 허탈함을 느끼며 속상해할 겨를도 없이 다시 듣게 된 절망적인 소식, 바로 어머니의 간암 말기 진단이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고 심장이 터질 듯 아팠으며 눈물은 쉴 틈 없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없이 자란 형과 나를 안아주며 마음 아파하셨던 따뜻하고도 아픈 그런 존재였다. 그런 엄마가, 술은 입에 한잔도 대지 못하던 우리 엄마가 간암 말기라니 믿을 수 없었다. 내 간을 이식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지만, 혈관에 붙어버린 암세포를 어찌할 방도가 없고 이식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휴가를 나가서 곁에 있어 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머니는 살이 빠지고 안색이 나빠지고 통화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말이지 잔혹한 운명처럼 느껴질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석 달 정도가 흘렀을까,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당시 부대에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 휴가를 보내주신 대대장님, 정작과장님, 지원과장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 드릴 수 있었으니 이 자리를 빌려서라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전역을 마음먹었다. 군인으로 살면서 ‘내가 지켜야 할 정말 소중한 존재는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중위로 전역했다. 6년간의 희로애락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목축 사업을 잠시 도우며 몇 년 동안 떨어져 지낸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다시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서 손에 꼽는 이발사’가 될 것이라 가족 앞에서 다짐하고 돈 한 푼 없이 서울로 상경한다. 고향 집에 값나가는 가전제품과 부족한 것들을 사드리고 용돈까지 드리고 나니 아주 적은 금액만 남아 친구에게 돈을 빌려 신림동 대학가의 옥탑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낮에는 이용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호프집에서 서빙 알바를 하며 이발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악착같이 호프집 서빙, 칵테일바 웨이터, 일용직 잡부, 퀵 배달 아르바이트, 촬영 엑스트라 등등 정말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6년의 군 생활은 나에게 ‘제대군인지원센터’라는 큰 선물을 주었고 덕분에 학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그 또한 참 고맙고도 감사한 복지라고 생각한다.

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나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신 학원장님께서 장교 출신인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자기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권유해주셨다. 정말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일하게 해준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기에 냉큼 승낙하고 자격증을 취득함과 동시에 학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6년 중순, 자격증 취득과 취업을 동시에 이뤘고 적은 보수였지만 열심히 배우며 일했다. 일을 배우며 친구들을 상대로 복습하고 실력을 쌓았고 1년 정도 일을 한 후 이태원에 있는 바버샵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실전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배우며 즐겁게 일했다. 그렇게 다시 1년 정도 일하고 독립해 지금은 강남 도곡동에 작은 바버샵을 마련하여 운영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참 많지만, 꾸준히 와주시는 단골손님들이 있고 그렇게 나는 행복한 이발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대의 군인으로 시작된 30대 이발사의 삶. 이발병이 아니고서야 절대 연관성 없는 이 두 가지 키워드는 늘 손님의 호기심을 자극하곤 한다.

“혹시 이발병 출신이신가요?”
“아닙니다. 저는 통신장교라서 이발병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발사로 일하면서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군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것이다. 군 생활도 이발도 전문성과 소통이라고 생각했고, 남자들과의 소통은 지난 수년간 해온 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발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할만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도 공부는 계속되고 있고 부족한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게에 홀로 남아 연구를 하다가 새벽에 퇴근하기도 한다. 앞서나가는 누군가와 어깨를 마주하기 위하여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혼자서 매일 싸워가고 있지만, 나를 성장시켜줄 고통도 결국은 행복을 불러와 주니 나는 앞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가족에게 약속했던 최고가 되리라는 그 약속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다.

※ 본 수기의 내용은 과거이므로 현재의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