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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여기 가게

근현대사 자취를 따라 걷는 시간 여행, 부산

‘40계단과 보수동 책방 골목’

부산의 진면목은 드넓은 모래사장이나 아찔한 고층빌딩이 몰린 바다가 아니라 산자락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길에 있다. 끝없이 이어진 좁은 골목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삶이, 산업화의 바람을 이겨내었던 노동자의 땀방울이, 그리고 여전히 그 땅에 발붙이고 사는 누군가의 오늘이 살아있다.

글 · 양샘   자료 · 부산시, 금수현 음악살롱, 민주공원, 보수동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품은 거리

중앙역 11번 출구를 나와 우회전하면 그 유명한 40계단이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옛 부산역 근처였던 이곳은 수많은 피난민들의 만남의 장소요 장터였으며 삶의 현장이었다. 전쟁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떠밀려 온 이들은 이곳에서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날 약속을 하거나 구호 물품을 사고팔거나 고지대 판자촌에 마련된 작은 임시 거처로 향했다. 그 생생한 삶의 기억들이 이 계단에 새겨졌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민주공원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산복도로와 그 일대 산비탈에 형성되어 있는 산동네 역시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지역이다. 개항기 시절 유입된 외지인부터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이 얼기설기 모였다. 어떤 형태로든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자리 잡고 살 수 있는 곳은 이처럼 경사진 산비탈의 무허가 판자촌 정도였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마구잡이로 경계를 삼고 집을 만들어 생겨난 마을이 많아 이 지역은 도심 한 가운데임에도 철도나 도로 등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발전이 더디었고 덕분에 1900년대 초 중반의 모습과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집집마다 지붕이 연결되어 여러 채가 한집처럼 보인다거나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좁디좁은 골목을 우리 집 너희 집 구분 없이 마당처럼 공유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타임머신 타고 나만의 보물을 찾는 골목 여행

산복도로 끝에서 자갈치 시장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보수동 책방 골목을 만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이던 시절에 함경북도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헌 잡지 등을 처음 내다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목이다. 종전 후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이 국제시장에 정착해 살던 시절, 가난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책을 구하기 어려웠고 덕분에 이 헌책방 거리는 성황을 이루어 1970년대에는 최대 70여 점포까지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점포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이곳은 옛 정취가 그대로다. 서로 이웃하고 있는 책방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골목길을 천천히 지나가면 오래된 헌책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어느 책방이든 멈춰서서 보물찾기하듯 책들을 하나씩 펼쳐보면 절대로 새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가 공들여 책을 싼 비닐이나 밤새 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공부를 한 흔적, 때로는 보내지 못한 연서까지. 이렇듯 부산의 살아있는 역사와 생생한 삶을 만나려면 큰 빌딩과 사람이 가득 찬 도심지가 아니라 골목으로 들어서야 한다.

책과 음악과 커피 한 잔이 스며들어 있는 골목

그렇게 옹기종기 이어진 지붕들과 담벼락 넘어 산복도로를 걷다 보면 민주공원과 중앙공원 인근에 자리한 북카페 ‘밀다원 시대’를 만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예술인들이 당시 광복동에 위치한 ‘밀다원 다방’에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소설가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는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부산 중구가 밀다원 다방의 정신을 살려 2013년 오픈한 이곳에서는 1층에 자리한 중구노인일자리지원센터를 통해 교육받은 실버 바리스타가 직접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 메뉴를 제공하고 있으며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부산항을 감상할 수 있는 ‘뷰 맛집’이다. 여기서 조금 더 직진하면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인 금수현을 기려 지어진 ‘금수현 음악살롱’이 나온다. 음악 작업실처럼 꾸며진 이곳은 금수현 일가가 살았던 대청동의 ‘산집’을 기념하여 지어진 곳으로 음악 카페와 마을 커뮤니티 문화센터를 겸하고 있다. 1층에서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2층 카페에서는 턴테이블로 LP 음악을 감상하며 그동안 걸어온 골목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을 굽이굽이 다니다 보면 그저 오래된 주택 입구처럼 생긴 노란 대문을 만나게 된다. 보수동 골목 특유의 분위기와 옛 주택의 정취를 그대로 살린 카페 ‘보수동가’다. 골목 안쪽에 있어 조용한 분위기의 이곳은 휴식을 모토로 맛있는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내고 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여행한 후 그 맛을 음미하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