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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펼침

새 출발을 앞둔
제대군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글 · 정선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 여기 보세요~ 찰칵!”

유치원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 대학 졸업식… 우리 인생에는 한 장의 사진처럼 잊을 수 없는 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군인들에게는 군대에 대한 카테고리가 하나 더 추가됩니다. 처음 ‘군복을 입던 날’이라던가, 전역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날들 끝에 드디어 다가온 ‘전역하는 날’의 기억같은 것들이지요.

처음 보직을 받고 마주한 까마득한 선배 상관들과 자신만을 보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눈빛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전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선뜻 대처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훈련 때 이렇게 했더라면, 이 상황에서 저렇게 했더라면... 수많은 생각에 뒤척이며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던 수많은 밤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겁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군 생활이 시작됩니다. 혼란스럽고 어리바리한 신입 간부 시절을 겪어내고 나면, 어느새 여러 풍파를 겪어낸 한 명의 늠름한 군인을 거울 속에서 조우하게 되지요. 그리고 평상복보다 군복이 더 편하고 내 몸같은 시간들을 수없이 보내다 보면 이제는 조금 낯설어진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내 안에서 쉬지 않고 흐르던 국방부 시계의 초침과 안녕을 고할 때가 온 것이지요.

군인의 신분으로 군대에서 지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라는 한 개인의 정체성은 넣어 두고, 군대라는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선임의 말은 진리이자 곧 법이 되고요. 다행히 시대가 변화하면서 군대도 점차 더 나은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군대의 자구책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운영 체계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지닙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좋은 추억 하나만 얘기해 주세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좋은 추억 하나’에 대한 답변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입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군대는 청춘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복불복이라 ‘인생 멘토’로 여겨질 만큼 좋은 선임을 만날 수도 있지만, 꿈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온갖 군상들과 엮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리는 군대에서 꽤 많은 것들을 처음 배우고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군대라고해서 내내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도 쉴 땐 쉬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개인 시간이 주어집니다.

사회에서라면 남아도는 시간쯤으로 여겼을 주말도 군대에서는 허투루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 시간을 개인 역량을 기르는 데 꾸준히 잘 활용하거나 전역 전부터 꾸준히 제2의 인생을 준비한 분들이라면, 전역할 때쯤 어느 정도 취업이나 창업 같은 진로를 준비해서 나오거나 공부, 운동이나 독서, 음악같이 자신만의 취미를 찾아 훨씬 발전한 모습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나’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군 생활을 기점으로 가정이나 사회, 국가 등 공동체에 속하고 연결된 ‘나’의 실체로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얻게 된 확장된 자아 정체감이나 객관적인 인식은 인생의 가치관과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한 직장이나 사회 같은 국가에 소속된 구성원이라는 자의식을 군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자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각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쉽사리하기 힘든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질문과 고민의 시간들은 우리를 한 뼘 더 자라게 해주었을 겁니다. 전역 이후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때 어떤 포지션에서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감당해낼 것인지 숙고하게끔 합니다.

무엇보다 군 생활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상황을 겪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마음을 다치기도 하며 위로받을 때도 있고 생각지 못한 배움을 얻으며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군대에서는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회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직면하고 문제 방법을 찾아내어 해결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어떠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사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 현실에서 도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황의 경중에 따라 다르겠지만,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라면 도망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도망쳤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더욱 가중되는 경우 문제가 되지요.

하지만 군에서는 격려해주는 선후배들이 있고 뒷받침해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도망칠 수 없도록, 그리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 때 그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돕고 격려하고 힘이 되어줍니다. 군대라는 곳만큼이나 나 하나의 행동이 전체 공동체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조직은 없습니다. 그만큼 군 생활을 통해 하나라는 연대감과 공동체적 감각을 익혔습니다. 사회로 나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들은 군에서 성격도 취향도 특기도 다양한 선배들과 부대원들을 겪으면서 충분히 워밍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서로 손 잡아 이끌고 뒤에서 밀어주는 경험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도 행군 시 낙오되었던 선후배와 병사를 챙기는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손을 내밀어 줄 넓은 가슴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소년에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추운 겨울밤, 새벽잠을 참아 가며 국민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운 대한민국 장병들의 시간을 누가 감히 헛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있어 오늘도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노고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대한민국 국군 장병 여러분,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젊은 날의 꿈을 마음껏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그 꿈을, 이제는 저희가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