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일, 22년여간 젊은 청춘을 오롯이 바쳐온 군을 뒤로하고 사회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날이지만, 그다지 기억이 생생하지만은 않다. 전역을 앞둔 시점부터 지금의 주택관리사 업무를 시작하기 전까지, 거의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줄곧 해왔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개인 사정으로 장기복무자에게 주어지는 직업보도교육도 받지 못하고 전역 이후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정립하지 못한 상태로 던져지다시피 사회에 복귀하여 거의 1년간 퇴직금과 연금에 의지하며 구직활동도 하고, 군 생활 동안 자유롭게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도 수시로 다니면서 강제에 가까운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먼저 전역하신 선배님의 소개로 광주제대군인지원센터에서 실시하는 전직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구직상담과 알선, 직업능력교육비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좁디좁은 취업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2013년 말경, 호주에 연고를 둔 지인과 의기투합하여 호주에 본사, 한국에 지사를 두고 호주, 뉴질랜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여행업 법인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2019년 초 여행업계를 덮친 악재와 경쟁, 인건비에 대한 압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렵게 끌고 오던 법인을 정리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창업지원 상담 등을 통해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던 광주제대군인지원센터의 순회상담에 참여하면서 주택관리사 자격증에 대해 소개받고, 군에서의 업무 경험과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주택관리사 사이버교육 과정 수강을 신청하고 시험 준비를 시작하였다. 2019년 3월, 사이버교육 수강을 시작으로 7월 13일 1차 시험, 9월 28일 2차 시험을 마칠 때까지 집과 도서관에서 찌는 듯한 무더위와 밀려드는 졸음과 싸우며 하루 15시간 이상 시험 준비를 한 결과, 12월 고대하던 주택관리사(보) 합격증을 받아들 수 있었고, 이제 이력서만 제출하면 금방이라도 관리사무소장으로 근무하게 될 것이라는 당찬 희망에 부풀었다. 그렇게 맞이한 2020년, 나의 51번째 봄은 1년 남짓 동안 오롯이 책으로만 익혀온 미지의 일터에 대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더해져 몸과 마음이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은 다음, 전라북도 주택관리사협회에서 개최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여 나의 동기들인 22회 주택관리사(보) 시험 합격생들이 전국적으로는 4,101명, 전북에만 80여 명의 막강한 인원이 있음을, 주택관리사 제도 시행 이후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 합격해서 한글과 숫자만 알면 합격한 기수라는 누명(?)을 쓰고 있음을 듣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관리사무소장으로 배치받기에는 부족하다 싶은 이력서를 보완하기 위해 주택관리사(보) 배치 전 교육, 소방안전관리자 교육, 승강기관리 교육 등을 이수하고, 몇 곳의 위탁관리회사에서 실시한 간담회에 참석하거나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이력서를 제출하면서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둘 동기들이 임명되어 배치되는 소식에 나에게도 곧 순서가 올 것이라는 희망과 이러다 배치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초조함이 교차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살펴보아도 경력과는 다른 주택관리 분야에서 거의 왕초보에 가까운 내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위탁관리회사와 선배 소장님들을 찾아뵙고 솔직하게 어려움을 말씀드린 다음 조언과 도움을 구했다. 조언의 요점은 두 가지로 첫째, 배치되는 순서는 중요하지 않으니 자신을 다그치지 말고 초조해하거나 자존감을 잃지 말 것. 둘째, 위탁관리회사에서 나를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조건과 실력을 갖출 것이었다. 어렴풋이 길이 보이고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실행에 옮기자! 우선 고용노동부 취업성공패키지 대상자로 등록하고, 경리업무를 겸임할 것을 대비해 회계학원에 다니면서 아파트 업무와 연관을 지어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을 받았다. 계획한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한 가지, 연수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입사를 마음에 두고 자주 인사를 드렸던 위탁관리회사의 인사담당자를 찾아가 다시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고, 인사담당자가 추천해준 아파트의 선배 관리사무소장님이 흔쾌히 연수를 허락해주시어 오전에는 연수, 오후에는 회계 수업을 병행하며 배치를 기다리게 되었다.
업무가 깔끔하게 정돈되고 직원들 간의 팀웍이 좋은 아파트에서 직접 현장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그저 배치만 되면 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오산이고 자만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전기실, 저수조, 생활오수관, 지하주차장 곳곳의 바닥과 누수 우려개소, 알람밸브실, 집수정과 배수펌프, 지하공동구 등 매일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시설점검 하나에도 시설물에 대한 지식은 기본일 뿐, 그 시설물의 이상 여부를 콕 집어서 발견해 낼 수 있는 수준의 안목이 필요했다. 수시로 접수되는 생활민원에는 민원 대응과 동시에 현장을 확인했다.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기술과 순발력이 필요하고, 20층 꼭대기 지붕보다 더 높은 조형물에 고드름이 생겨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물 고임을 점검하고 제거하는 작업에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입주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책임감이 필요했다.
비록 짧은 연수였지만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 일들을 사전에 살펴볼 수 있었고, 선배 관리사무소장님 가까이에서 업무 진행과정을 보고 들으면서 업무에 임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으며, 내가 관리사무소장이 되면 따라서 해보고 싶은 업무도 챙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쁘신 중에도 선배 관리사무소장님께서 기꺼이 내주신 대화시간은 궁금한 점에 대한 답변을 얻음과 동시에 주택관리사와 업무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법과 규정, 원칙을 지켜가면서도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외유내강의 스킬로 인사, 행정, 회계, 시설 등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듯한 관리업무를 묵묵히 수행해나가시는 선배 관리사무소장님들께 경외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지난 3월, 신규 입주를 시작하는 단지의 관리사무소장으로 배치되어 어언 4개월을 입주민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 오늘도 ‘나는 관리사무소장이다’를 나지막이 외치며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입주민을 대하듯 미소도 지어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사무소장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고, 오늘도 어떤 멋진 일이 생길까를 기대하며 나선다.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오늘의 나를 잊지 않기를, 항상 오늘처럼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기를 바라며, 아파트 입구 저 만큼에 걸려있는 현수막의 글귀를 이렇게 읽어본다.
‘제대군인, 너무 애쓰지 마.
그대들은 본디 사회의 일원이 될 운명이니’
* 본 수기는 과거이므로 2022년 자격증 시험제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