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건축물은 리모델링해야 경쟁력이 생긴다. 리모델링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고 어디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전략이 필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서른 살까지 몸으로 체득된 개인적, 시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준 신념은 분명 구형 모델이다. 더군다나 변화가 많은 요즈음 같은 세상에 여전히 젊었을 때의 신념으로 산다는 것은 온몸이 꼰대 화석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인생 2막을 싱싱하게 살아내려면 내가 누구인지 의식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뇌의 가소성’ 이라는 말은 그래서 반갑다. ‘뇌는 천천히 바뀐다’는 뜻인데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천천히’가 아니라 ‘바뀐다’에 밑줄을 긋는 일이다. 그 밑줄 아래서 진짜 나를 만나는 일, 이것이 빼놓을 수 없는 리모델링의 과정이다. 오래 입어 편안하던 습관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일에는 불편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불편을 기꺼이 감수 했을 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성 이어령 선생님은 ‘덮어놓고 살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나셨다. 남아 있는 우리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면 진짜 나를 만나는 방법 ‘나는 누구인가’의 덩어리 물음을 선명하게 만들어보자.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내가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평생 그 감각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따지고 보면 다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내 탓이라 여기면 자기성찰이 이루어져 변화, 발전하지만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함만 쌓여 결국은 내 삶만 피폐해질 뿐이다. 내가 어떤 습관으로 살아왔는가에 따라 도착 지점도 달라진다. 인간의 역동성이라는 말은 그래서 유용하다. 내 몸에 체화된 습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알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설정이 명확해진다. 그러면 바로 직진할 에너지가 생기고 꾸준히 갈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꾸준히 실행한 것들 위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행여, 당신은 남 탓을 하며 변명 뒤에 숨어 내가 안 되는 열 가지 이유를 찾느라 시간을 탕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습관은 위험하다. 스스로 폭탄을 던지는 행위다.
나는 적지 않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꾸준히 할 수 있는지 집요하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주 5일 새벽 5시 30분 기상, 계단 30층 오르기, 10분 명상, 하루 50장 100페이지 읽기, 나에게로 출근하는 네 가지의 목록을 기록하고 체크하는 일. 이 루틴은 내 삶을 리모델링하는 중요한 지렛대가 되었다. 내가 작심 3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던 것도 적어도 일 년에 내 키만큼은 읽고 쓰자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 읽기 습관이 안 된 나는 두 줄도 읽지 못하고 책 밖으로 나간 생각을 책 안으로 데려오는 반복을 이어갔다. 사실 책 한 권, 열 권을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저 스스로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는 뿌듯함을 쌓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성취가 자존감의 근육을 채웠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마련해 주었다.
사람 사는 일이란 소크라테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일의 문제보다 관계의 문제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사실이다. 나이를 먹는 일은 그만큼 인문학적인 경험치가 많아진다는 뜻이고 그 위에 덧대는 독서의 습관이야말로 책이 아니라 삶의 근육이 된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뿐, 인생 2막에는 철저하게 자신에게로 돌아와 나를 키우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최상이지만 인간은 다이아몬드처럼 정제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남 보기에 좋은 삶이 아니라 나 보기에 좋은 삶, 남의 속도가 아니라 내 속도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서 남과 비교할 게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자신의 성장을 바라보는 일로 내 기쁨을 벌어야 한다. 이 기쁨이라면 리모델링의 값어치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전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