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직, 한 분야에서 긴 경력이 있다는 것은 그 위치에 안주하거나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쉬울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그 편안함이라는 옷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안주하지 않고 생각을 바로 옮기는 습관을 통해 공백없이 전역 후 인생 2막을 시작한 백판구 이사를 만나 인생 2막의 열쇠인 습관에 대해 들어보았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 사이로 타워크레인이 아찔하게 서 있는 어느 물류센터 건설 현장. 소방설비가 깔리고 그 위에 부어진 콘크리트가 굳어가는 사이로 바삐 다니며 설치 현장을 감리하는 매서운 눈빛이 오간다.
“포괄적이고 집단적인 군 생활과 사회에서 경험하는 직장 생활은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전문성입니다. 물론 사회에도 계급과 서열이 존재하지만, 특히 기술이 기반이 되는 건축, 기계, 전기, 소방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나이, 계급, 학벌보다 우선합니다. 저도 이사급 책임감리지만 본사의 감리 경험 많은 30대 과장에게 항상 문의하고 조언을 받습니다.”
설계 및 감리전문업체에서 감리 이사로 재직하며 건설 현장에서 소방책임감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백판구 이사가 군 생활과 사회생활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육사 43기 출신으로 야전 기갑·기계화 부대에서 지휘관과 참모로, 육군본부와 합참 등 정책부서를 거쳐 육군기계화학교 전술학단장과 포천 제1기갑여단에서 부여단장을 끝으로 지난 2021년 11월, 34년의 군 복무를 마쳤다. 누구보다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백판구 이사는 그 자부심과 군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제2의 인생을 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자기 경험과 경력에만 기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습관, 생활을 새롭게 하고 누구보다 진취적으로 도전하고 노력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에 한 번 더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을 통해
하나만 생각하기보다 다양한 가능성과
방법을 고려하여 미래를 준비합니다.
“전역 3년 전부터 인생 2막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비교적 일찍 전역하여 사회에서 치열한 삶의 고초를 극복하고 잡초처럼 뿌리 내린 선배들을 만나 장기간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군에 대해 많은 조언을 들었습니다. 소방책임감리는 제가 목표했던 최초의 직업군은 아니었습니다. 시설관리자가 목표였으나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유사 자격증이나 경력을 연계하여 융통성 있게 투트랙, 쓰리트랙으로 준비하면서 변경되었습니다.”
백판구 이사는 민간 시설 분야에 장기간 종사 중인 예비역 선배의 경험담을 참고해 전역 3년 전부터 단계적으로 주택관리사, 전기기사, 소방기사를 준비했다. 덕분에 전직기본교육 입교 전 필수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고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실무 위주의 교육과 예산지원을 받았다. 이후, 전직지원 기간에 단기 과정을 진행하면서 관련 업계 경험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로를 소방책임감리로 변경, 소방감리실무교육과 실무에 필요한 오토 캐드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군 생활은 전역 후 새로운 직업과 환경에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직장 내 상호관계, 업체 간 협력과 소통, 상호 신뢰, 업무 처리 절차상 요구되는 지혜 같은 것들은 군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이 그대로 적용되지요. 특히 안전관리 분야는 군이 구축한 모범적이고 표준화된 시스템이 거의 그대로 적용되므로 군에서 체득한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전역 전부터 융통성 있는 준비를 통해 소방설비기계 및 전기 분야에서 2개의 기사자격증을 따냈고, 34년의 군 경력이 모두 소방경력으로 인정되어 한국소방시설협회으로부터 공식적인 소방특급 감리자격 인정 수첩을 받게 된다. 덕분에 전역 다음 날부터 출근과 동시에 인생 제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저는 고민하거나 사색하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면 바로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또한 세상에 공짜는 없고 신이 모든 것을 동시에 주지 않은 만큼 공평하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몸에 습관으로 배어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에 한 번 더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을 통해 백판구 이사는 항상 하나만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과 방법을 고려해 미래를 준비한다고.
“전역이 임박한 많은 장기 군 복무자들이 긴 시간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니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문과 출신이라 국가기술자격증을 따기 어려울 거라고 자신감 없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낮게 생각하거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공도, 병과나 보직도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하는데 전혀 장애 요소가 아닙니다. 또한 지나간 경력 역시 새로운 배움에 장애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도전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
현재 종사하고 있는 소방감리분야에서 자신과 같은 군 간부 출신이 더 많이 진출해 사회로부터 믿을 수 있으며 체계적으로, 전문적으로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앞서가겠다는 백판구 이사. 무덥고 습한 여름 날 오후, 땀을 뚝뚝 흘리는 날씨에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맡은 현장을 직접 발로 뛰는 그의 꿈은 화재로부터 국가와 국민들이 안심하는 세상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