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새 인생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청춘의 편린

글 · 정영경 예비역 육군 대위

꿈의 완성과 함께 불가피하게 찾아온 전역

2002년 육군 3사관학교 37기 포병장교로 임관해 2006년 육군항공장교로 전과하고 선택한 장교와 조종사는 명예롭고 보람되게 살고자 한 나의 오랜 꿈이었다. 때문에 임무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내왔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비행경력과 지식이 쌓여가면서 항공기 사고는 조종사의 잘못뿐만 아니라 기체결함, 정비 불량, 기상악화 등 예상치 못한 수많은 가변적인 요소로 생길 수 있다는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 유독 내가 조종을 한 항공기는 불시착하는 경우가 잦았고 ‘나는 항공기 조종과 궁합이 맞지 않나?’라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비행 전날엔 걱정과 공포로 잠을 못 자고 비행을 못 할 상태까지 되어 장교로서도 조종사로서도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2008년 6월 전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알게 된 나의 적성과 진로

불가항력적인 전역 후 앞으로의 생활이 너무나 두렵고 막막했지만, 한편으로는 군인으로서 어떠한 임무도 완수해왔기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나에게 사회는 냉정했다. 무조건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군 경력만으로 100군데가 넘는 기업에 지원했지만 그 어느 곳도 불러주지 않았다. 스스로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상담사와 함께 적성을 찾기 시작, 영업이라는 직업군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대기업 제약회사를 목표로 취업 준비를 했지만, 나이 제한과 함께 장교와 조종사라는 이력이 회사에게는 부담으로 다가가 낙방하게 되었다. 사회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생활비로 줄어드는 퇴직금을 보며 어떤 일이라도 구해야 했다. 당시(2008년 말)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인턴사원 모집에 지원 후 결과를 기다렸는데 센터장님께서 마침 구인 의뢰가 들어온 중소제약회사의 입사 지원을 추천해 주셨다. 고민도 필요 없었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았기에 바로 지원, 2009년 2월 그토록 원했던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군인 정신이 빛을 발한 두 번째 직업, 제약 영업

내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되었던 것은 군인 정신이었다. 사회에서의 첫 직업으로 제약 영업은 너무 힘든 일이다. 의료계에서 흔한 영업사원에 대한 무시와 각종 갑질, 인격모독으로 인한 수치심은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니 지금의 부적응은 사회에서 강하게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란 생각이 들어 이겨내 보기로 했다. 장교 시절 참모업무를 떠올리며 의사들을 지휘관으로 생각하고 사소한 부탁부터 어려운 일까지 완벽하고 깔끔하게 소화해나갔다. 신규 목표 병원은 동일한 시간대에 지속해서 방문하고 인사를 하니 의사도 궁금해하며 만나주기 시작했다. 겨우 5분의 시간을 얻었을 때는 조종복을 입고 인사하며 어필하기도 했다. 1년 동안 군인 정신으로 활동한 결과 매출 1위를 달성할 수 있었고, 회사 창립 이래 최초로 신입사원이 1년 만에 대리로 진급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높아져 가는 실적으로 회사 내에서도 의사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금씩 커져만 갔다. 입사 3년 차, 영업직 특성상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불안한 미래에 대비해 사업을 병행하기로 계획하고 일본 수입 네일 용품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입사 후 5년, 사업 경력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업매출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사업을 하고 있으니 괜찮다”며 회사 일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온라인 사업 역시 “사업매출이 없어도 직장이 있으니 괜찮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나태해져 가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2014년, 과장 승진을 앞두고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군 경험과 영업 경험으로 일으킨 내 회사, 미소예

회사를 그만둔 당시, 사실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본이 많은 경쟁업체의 등장으로 매출이 거의 없었다. 내 선택이었지만 막막하고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네일샵을 직접 돌던 어느 날, 샵 원장님의 제품에 대한 불편 호소를 접하고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재고로 쌓아놨던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유행에 민감한 네일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제품군의 불편함을 개선한 아이디어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30대 중반, 국비 지원으로 네일아트 자격반 강의를 들으며 관련 지식을 쌓고, 네일샵을 돌며 불편한 제품군의 특성과 불만들을 수집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서 유튜브와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제품 만들기를 연구했고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쳐 2016년, 드디어 나만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광고할 자금조차 없었기에 SNS로 매일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제품의 장점을 홍보하며 팔로우들과 교류했다. 그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일까. 1년 후 SNS상에서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직접 만든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빛이 조금씩 보이는듯했다. 내가 만든 제품과 브랜드를 더욱 알리기 위해 특허권을 따내 치열한 네일 시장에서 브랜드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특허를 위한 자금조차 없었기에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정부지원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장교 생활 때 참모업무를 많이 해왔던 내게 사업계획서 작성과 사업계획에 대한 브리핑은 어렵지 않았다. 군 경험을 바탕으로 실태와 원인분석, 그리고 개선된 제품의 장점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계획서를 작성하였고, 1차 서류 통과 뒤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제품에 대해 훈련계획 브리핑하듯이 브리핑을 마친 결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원대상 기업으로 선정되어 2017년 특허권을 따냈다. 또한 2018년에는 정부의 도움으로 홍보영상까지 제작하게 되어 홍보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지금 회사 규모는 아직 작지만 굵직한 회사들 사이에서 네이버 쇼핑 네일 스티커 분야 인기 브랜드 1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 도매 거래처 45곳과 대만, 태국 등 2개의 해외 거래처를 보유하고 있다.

내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치관이 완성되지 못했던 20대 간부 시절, 책임감과 직관력,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악바리 근성을 몸소 배워 인생의 철학과 가치관 확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역을 앞두거나 전역을 한 선후배, 동기들은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군 생활을 통해 우리는 조직에 대한 이해와 조직에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알게 모르게 배웠다. 또한, 일반인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책임감을 느끼고 생활해 왔다. 처음부터 성공하는 삶은 없다. 작은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본인이 생각하는 결과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도전하고 견뎌내면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